든든하게 '그림' 지켜온 중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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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여년 한국 화단을 유행처럼 물들였던 것은 설치미술을 비롯한 실험 작업이었다.

순수 평면화조차 이런저런 혼합 재료와 기법으로 변형돼 나타났다.

전래 작업을 해오던 작가들은 흐름에 뒤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에서 새 시도로 그림 세계를 비틀곤 했다. 하지만 전통적인 미술은 오래 지속돼온 그 역사 속에서 늘 화가들을 지켜온 든든한 땅이었다. 요즈음 미술계는 그 오랜 전통의 힘으로 천천히 돌아가는 움직임을 보여준다.

화가 김홍주(57)씨는 화면 전체에 꽃 하나, 잎 하나가 떠 있는 평면으로 일관해왔다. 단색 아크릴 물감이 흰 캔버스를 누비듯 수많은 붓질로 일궈낸 하나의 형상은 그 자체 외에 다른 설명을 불가능하게 만든다.

23일까지 서울 소격동 국제화랑에서 열리고 있는 개인전에 나온 예의 꽃과 잎들은 여전히 세부에 탐닉해 화면 속으로 몰입해 들어간 작가의 눈을 떠오르게 한다. 김씨는 자신의 꽃그림을 "보는 이들 입을 막으려는 행위"라고 말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감각과 인식의 세계를 그는 두드리고 있다.

작품 앞에 선 사람들이 그림 속으로 몰입해 들어갈수록 꽃도 사라지고 잎도 없어져 개미가 쑤시고 다니듯 화면 속을 여행하는 그 일체감을 그는 원한다. 그는 꽃을 탐닉하며 재현했으되, 꽃은 없고 백일몽같은 쾌락의 느낌만이 남았다. 02-735-8449.

7일부터 17일까지 서울 사간동 갤러리 현대에서 개인전을 여는 박영남(53)씨는 캔버스를 땅으로 삼아 그 광활한 대지를 일구는 농부가 됐다. 물감을 흙덩이 주무르듯 손가락으로 발라간 '하늘에 그려본 풍경' 연작은 산맥이 솟고 골짜기가 드러난 땅 속으로 보는 이를 데려다 눕힌다. 손가락에 밀려 지워지고 긁힌 그 색면의 흔적들은 작가가 지나온 시간들이 고여있는 감각의 대지다.

그는 "형식을 논하는 이 시대에 세상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것을 찾아보고 싶었다"며 "머리로 그린 그림은 힘들어, 내 몸 속에 오래 전부터 흘러온 기질, 자연을 주섬주섬 거두고 있다"고 말했다. 02-734-6111.

정재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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