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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부.39회 기초생활보장제>'환란 극복' 선언한 DJ "이제 복지는 권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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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국제통화기금(IMF) 위기 상황 아래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저는 우리 국민의 저력에 대한 확신이 있었기에 1년반 안에 외환위기를 이겨내겠다고 약속할 수 있었고, 또 이 약속을 지킬 수 있었습니다. "

1999년 8월 15일 천안 독립기념관.

전날 밤 늦게까지 직접 고치고 다듬은 광복절 경축사를 읽으며 DJ는 '외환위기 극복'을 거침없이 선언했다. DJ가 공식 연설을 통해 외환위기 극복을 선언한 것은 이때가 처음이다. 과연 취임 이후 '1년반' 만이었다.

'서민층 배려 소홀' 반성

이날 경축사에서 DJ는 여러가지 개혁·국정 과제를 한꺼번에 의욕적으로 쏟아낸다. 경축사인지 새 국정 공약인지 분간이 어려울 정도였다.

'돈 안드는 선거' '지역구도 타파' '주택보급률 1백% 달성''수해 방지' 등 수많은 과제를 제시하며 DJ는 '역사상 처음으로 재벌을 개혁한 대통령이 되겠다'는 약속과 함께 '생산적 복지'를 새 국정지표로 내세운다.

복지 앞에 '생산'이란 수식어가 붙은 이 색다른 용어는 어떻게 시장경제·민주주의와 함께 3대 국정지표가 됐을까. 그것은 또 과거의 복지 정책과 얼마나 다른 것인가.

용어만 놓고 보면 '생산적 복지'는 95년 YS 정부 때도 거론된 전례가 있어 DJ 정부의 신조어(新造語)라 할 수 없었다.

DJ 정부에선 98년 4월 복지부의 업무보고 때 등장하긴 했으나, 그때는 '경제를 희생시키지 않는 범위 안에서의 복지'(김종대 당시 복지부 기획관리실장의 회고)였다.

그 뒤 환란의 소용돌이 속에 묻혀버린 이 말은 98년 후반 제2건국위원회와 정책기획위원회 등에 포진한 DJ진영 이론가들에 의해 되살아난다. 대량 실업 사태 속에 청와대와 여당 주변에서 '지지기반인 서민·빈곤층에 대한 배려가 소홀하다'는 반성이 커가면서였다.

용어는 복지부의 그것과 같았지만, 철학과 방법론은 크게 달랐다.

DJ의 오랜 브레인 역할을 해온 김성재 당시 제2건국 범국민추진위원회 기획위원(현 문화관광부 장관)의 설명.

"생산적 복지에는 세가지 철학이 있다. 첫째, 복지는 자선이 아니라 인권이다. 둘째, 복지 수혜자들에게 자활의지를 복돋운다. 셋째, 국가 전체로 볼 때 복지를 통해 경제성장이 이뤄진다. 이 주장을 과거 정부는 수용하지 않았으나 DJ는 그런 철학을 갖고 있었다. "

그럼에도 국정 우선순위에서 밀려 있던 '생산적 복지'는 99년 3월 DJ가 동향인 하의도 출신의 노동경제학자 김유배 성균관대 교수를 복지노동수석에 앉힌 것을 계기로 정책의 중심부로 급부상한다.

김유배의 회고.

"외환위기 극복 과정에서 DJ가 외국투자가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시장경제를 강조하자 DJ 정책에 대해 '신자유주의'라는 비판이 거세졌다. 사실 DJ는 극단적 시장론자가 물론 아니었고 '시장론자 DJ'는 역사가 만들어 놓은 셈이었다. 그래서 복지노동수석이 되자 '생산적 복지'를 개념화해 국정철학과 연계하는 작업을 추진하겠다고 보고했다. "

하지만 '생산적 복지'는 그때까지 실체가 없었다. 김유배는 곧 '삶의 질 향상 기획단'을 만들어 생산적 복지의 개념화에 착수한다.

DJ는 김태동(현 금융통화운영위원)에게도 생산적 복지의 개념 정립화를 주문한다. 99년 4월 대통령 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을 맡기면서였다.

김태동은 두달 간의 연구 결과를 갖고 6월 말 청와대로 올라간다.

김태동:빈곤선 아래로 떨어지는 사람들에게 현물과 현금을 보조하는 사후적인 시혜보다 교육·훈련을 통해 일할 기회를 높여주는 게 필요합니다. '일을 통한 복지'를 해야 합니다. 물론 기초생활은 보장돼야 합니다. 그것이 생산적 복지입니다.

DJ:맞소. 유럽의 경우 잘못된 복지정책도 높은 실업률 등 위기의 한 원인인 것 같습니다. 유럽의 실패에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생산적 복지의 개념이 99년 6월에 비로소 잡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핵심 정책인 기초생활보장제는 훨씬 오래 전부터 추진돼오고 있었다.

추진 주체는 시민단체였고, 94년부터 벌여온 사회안전망 구축 운동이 그 시작점이었다.

DJ의 공약도 아니었던 이 제도가 본격 이슈화된 것은 98년 7월 참여연대·민주노총 등 19개 단체가 기초생활보장법 제정을 위한 국민청원을 국회에 내면서였다.

당시 기초생활보장법 제정 추진 연대회의 집행위원장을 맡았던 송경용 신부(현 봉천동 나눔의 집 관할사제)의 회고.

"외환위기 이후 실업자가 2백만명에 육박하는데도 사회안전망은 전혀 없었다. 생계가 막막하지만 생활보호법 대상이 아니어서 지원받지 못하는 빈민층을 위한 사회안전망을 만드는 것이 절실했다. '선(先) 성장, 후(後) 분배'라는 수십년간의 정책 패러다임을 바꿔야 했다. "

시민단체들은 여당인 국민회의로 몰려갔고, 이성재 의원이 이를 받아 기초생활보장법을 발의한다. 98년 10월이었다.

기초생활보장법은 기존 생활보호법과 차원이 달랐다.

생보법에선 빈곤층 지원은 국가의 '시혜(施惠)'라는 인식이 강했기에, '65세 이상 18세 미만'의 연령 제한이 붙는 등 조건이 까다로웠다.

하지만 새 법은 최저생계비 이하 세대에 대한 생활보장을 국가의 '의무'로 정의했고, 국민은 근로능력이나 연령에 관계없이 최저생계비를 보장받을 '권리'가 생기는 것이었다.

소득이 없는 4인가구라면 매달 93만원을 받을 수 있는 이 제도를 두고 보수층 일각에선 '사회주의적인 접근'방식이라고 공격했다. 정부 안에서도 시기상조라는 시각이 압도적이었다.

법안은 그해 연말 복지위 법안심사 소위를 간신히 통과했을뿐, 한발짝도 더 나가지 못했다.

"시장론자 DJ는 역사 産物"

이성재(현 마사회 상임감사)의 회고.

"재경부와 기획예산위·예산청의 반대도 극심했지만, 여당에서도 먹혀들지 않았다. '예산이 많이 들어서 안된다'는 주장이었다. 간신히 발의는 했지만 별 진전이 없었다. "

해를 넘겨 99년 봄이 지나도록 입법 작업은 지지부진했다.

이성재는 김성재에게 매달린다.

"아무리 해도 당에선 통과가 안됩니다. 제발 어른(DJ)께 말씀드려주십시오. "

때마침 옷로비 사건으로 궁지에 몰려 있던 DJ가 민심 청취를 위해 시민단체 대표들을 청와대로 불렀고, 김성재도 그 중 한명이었다.

99년 5월 중순 청와대 본관.

DJ가 김성재, 서경석 목사, 박원순 변호사, 지은희 여성사회교육원장 등과 마주앉았다.

DJ:기탄없이 말씀하십시오.

박원순:언로가 막혀 있어 여론 전달이 잘 안됩니다. 시민단체에서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도록 청와대 안에 담당비서관이 있으면 좋겠습니다.

DJ:적극적으로 검토하겠습니다.

김성재:이제 '개혁의 질' 관리를 해야 합니다. 사회안전망이 있고 국민의 기초생활보장이 되면 개혁의 발전이 이뤄지고 외환위기 극복 이후 개혁을 생산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게 됩니다.

DJ:그거 아주 중요합니다. 적극적으로 추진하겠습니다.

DJ는 이날 시민단체 앞에서 한 약속을 한달 뒤인 6월 21일 울산을 방문, 지역인사들과의 오찬석상에서 공론화한다.

'머지않아 국민생활보장기본법을 만들어 국민이 안심하고 생활할 수 있도록 국가가 대책을 세우겠다'는 요지였다. 꿈쩍도 않던 여당이 DJ가 결정하자 확 달라졌다.

다시 이성재의 회고.

"DJ 울산 발언 이후엔 일사천리였다. 비로소 기초생활보장제를 당론으로 채택해 새로 법안을 제출했다. 기초생활보장제는 DJ의 결단이었다. "

하지만 기초생활보장제는 야당인 한나라당에서 여당보다 반박자 빠르게 영글어갔다.

국민회의에서 법안이 지지부진하자 시민단체들이 한나라당을 찾았고, 빈곤 계층 지지를 확보할 수 있는 호기(好機)로 본 한나라당이 적극 입법하기로 당론을 모은 것이었다.

한나라당은 국민회의에 선수를 쳐 7월 6일 법안을 낸다. 남은 것은 경제부처와 복지부·노동부의 동의와 협조였다.

일이 되려고 그랬을까.

기초생활보장제의 중요성을 DJ에 입력시킨 김성재가 6월 24일 민정수석으로 임명돼 DJ 곁을 지키고 있었다.

김성재의 회고.

"민정수석 부임 후 첫 보고에서 개혁의 질 관리 차원에서 기초생활보장법·인권법·부패방지법 등 10가지 개혁입법을 해야 한다고 건의했고 대통령이 받아들였다. 기초생활보장법은 복지노동수석실에 속하는 법이었으나,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DJ의 교통정리에 따라 다른 개혁입법과 함께 내가 챙기게 됐다. "

DJ의 후원을 업고 경제부처 설득에 나선 김성재는 강봉균 재경부장관·진념 기획예산처장관을 만난다.

강봉균·진념:기초생활을 보장하려면 막대한 돈이 들어갈텐데요.

김성재:대통령님의 뜻이 확고합니다.

康·陳:뜻은 반대하지 않습니다. 다만 현실적으로 재정이 어렵습니다. 재정의 우선순위를 따져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지금은 공공근로부터 하고 기초생활보장제는 나중에 합시다.

金:그것만으론 생산적인 기반이 안됩니다. 지금이야말로 사회안전망을 짜야 할 시점입니다. 공공근로를 기초생활보장제 틀 안에서 하면 국가 전체로 재정수요가 크지 않을 것입니다.

康·陳:원칙적으로 그렇게 합시다. 대신 시기라도 조정합시다.

金:이번 국회서 처리하지 못하면 안됩니다.

DJ의 뜻을 앞세운 김성재의 설득은 주효했다. 정부의 법안 작업도 빠른 속도로 진행됐다.

경제부처 난색… DJ 결단

기획예산처·복지부는 아예 구체적인 법안 내용을 놓고 기초생활보장법 제정추진 연대회의와 협의를 벌였다. 김성재의 중재로 이뤄진 이 협의는 시민단체가 난생 처음 입법 마지막 단계까지 참여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정부는 빈곤계층의 근로활동 참여를 생계비 지급 조건으로 들고 나왔다. 조건없는 생활보장을 주장해온 시민단체들과는 처음부터 부딪친 쟁점이기도 했다.

다시 송경용 신부의 회고.

"정부에선 돈을 그냥 주면 유럽처럼 복지병이 생긴다는 거였다. 1인당 30만원 주는데 무슨 복지병이 생긴다는 건지. 하지만 그걸 양보하지 않으면 법이 무산될 판이었다. 결국 '자활근로조건부 급여지원'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기초생활보장법은 8월 12일 임시국회에서 통과됐다.

그때 DJ의 심경을 김성재는 이렇게 전한다.

"DJ는 기초생활보장법에 서명하며 '우리 사회에서 더 이상 돈이 없어 굶어죽거나 공부를 못하는 일이 없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한다'고 감격해했다. "

DJ의 말처럼 기초생활보장제의 위력은 대단했다. 국가에서 생계비를 지급받는 빈곤층은 99년 54만명에서 2002년 6월 그 세배가 넘는 1백39만명으로 늘었다. 2002년 관련 예산만 3조3천억원이다.

다시 김성재의 회고.

"DJ는 어느 지방을 가나 기초생활보장제를 점검했다. 내각에 대한 지시 때도 빼놓는 법이 없었다. DJ는 '기초생활보장제가 만들어진 것에 대해 큰 보람으로 생각한다'고 강조하곤 했다. "

그것이 가장 DJ다운 정책이었기 때문이었을까. 임기 후반 온갖 곡절을 겪으면서도 DJ는 기초생활보장제에 대해 각별한 애정을 기울였다.

흡사 그것이 DJ노믹스가 지향했던 모든 것을 담고 있기라도 하듯.

<특별취재반>

팀장:김수길 전문기자

기자:이정재·정경민·이상렬

djnomic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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