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選 경제공약 말로만 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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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현실 경제를 공부하는 학자들이 요즘 자주 듣는 질문이 혹시 어느 선거 캠프에서 일하지 않느냐이다. 이럴 때 그냥 웃고 넘어가면 두 가지 형태의 반응이 온다. 뭔가 숨기는 것이 아니냐 의심하거나, 아니면 별 볼 일 없는 사람으로 취급한다.

선거 캠프에 끼지 않는 거야 불러주지 않아서일 수도, 가기 싫어서일 수도 있다. 진짜 답답한 일은 어느 후보의 경제관에 동조하느냐는 기본적인 질문에도 쉽게 답이 나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가치판단과 무관한 연구를 하는 학자들도 많지만 조금이라도 현실 문제에 관심을 둔다면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한 생각은 있게 마련이다. 솔직히 지식인들이 자기 전공분야에 있어 후보들간의 선호를 못 따진다는 것은 창피한 일이다.

지조보다는 학연이나 지연 따위를 따져 여기저기 기웃거리는 불쌍한 먹물들이 워낙 많다 보니 그저 입다물고 있으면 선비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해야 할 말을 안하는 것도 비겁한 일이다.

개방의 바람을 헤치고 우리 경제를 제대로 이끌려면 지도자 스스로가 경제문제에 상당한 비전과 식견을 갖춰야 한다. 과거에 먹히던 정책이 더 이상 아닐 수도 있고, 선거전에 능숙한 참모가 최선의 경제각료가 못될 수도 있다.

결국 중요한 결정의 마지막 보루는 대통령 자신이다. 그런데 대선이 코앞에 다가왔는데도 전문가들조차 후보들의 경제관을 차별화하기 힘들어하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 아니다. 물론 세금이나 복지와 같이 이념성이 짙은 분야에서 제 목소리를 내는 후보들도 있다. 그러나 주장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국가 자원을 동원하고 배분하는 과정과 이에 수반되는 제약조건을 제대로 이해해 나름대로 가능한 선택을 제시해야 한다.

말로만 하는 약속은 당장 몇몇 이해집단의 표를 끌지는 모르지만 생각 있는 사람들의 눈에는 유치한 정치 술수로 비춰질 것이다.

예컨대 '부유세'라는 공약 자체가 문제라 보긴 힘들다. 과거에는 과세의 근거로 소득이 중요했지만 근자에는 여러 이유로 소비과세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 형평에 비중을 두는 진보진영에서 누진성이 약화되고 있는 소득과세의 대안으로 재산과세의 강화를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이에 따른 조세저항이나 비효율의 문제는 무시되고 그저 '부자들 혼내주는' 수단처럼 거론되는 것이 문제다.

복지분야도 그렇다. 이념적인 대립처럼 복지정책을 내세울 것이 아니라 적절한 소득분배가 때로는 성장 잠재력을 향상시킨다는 논리를 제공해야 한다. 또한 복지제도는 돌이키기 힘들다는 점을 감안해 장래의 재정수지를 충분히 고려해야 한다. 지금 있는 제도로도 재정이 결딴 날 판인데 장밋빛 공약만 내세운다면 신뢰 추락의 지름길이 될 수 있다.

재벌정책도 헷갈린다. 어떤 후보는 정책 자체는 나름대로 합리적이지만 재벌체제의 문제점을 부각시키는 데 소극적이다.

반면 재벌개혁을 주장하는 측의 입장을 들어보면 기껏해야 실패한 현 정부 정책의 끝자락이나 잡고 있는 식이다. 더 한심한 공약도 한 둘이 아니다. 아니, 자기들이 뭔데 툭하면 몇 %를 뚝 떼어서 할당제를 하느니, 국민소득의 몇 %를 어디에 쓰겠느니 하는 식의 말을 하는가. 표를 생각하기 전에 진정한 사회 형평을 고민하고, 돈의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얼마나 알뜰하게 쓰느냐를 따지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자기 임기 중에 경제성장률을 몇 %로 하겠다는 공약에 이르게 되면 정말 어안이 벙벙해진다. 이쯤 되면 경제를 정말 모르는 것인지 아니면 거짓말을 해서라도 당선부터 되자는 것인지 의아할 뿐이다.

우리의 지도자들이 벌거벗은 임금님이 되게 할 수는 없다. 이번 대선에서 낙선을 하는 분이라도 그동안의 공부를 밑천 삼아 다음 몇년 사회발전을 위해 중요한 역할을 하길 기대하는 것이다. 전투에는 지더라도 전쟁에는 이기는 멋진 후보들을 보고 싶은 것이다. 공약 연금술사들이 만들어온 내용을 보고 하늘이 두쪽이 나도 거짓말 하는 대통령이 되진 않겠다고 거절하는 멋있는 통치자를 고대하는 것은 나만의 바람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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