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은 '우연'에 의해 진화했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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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생물학은 물리학이나 화학에 비추어 학문적으로 주변적 위치를 차지해 왔다. 그러나 근래에 들어서 생명공학의 비약적 발달로 이제 생명과학은 기업계·정계 및 학계에서 가장 관심을 갖는 학문으로 뜨게 되었다. 그러나 이 학문이 구체적으로 무엇에 대해 어떤 대답을 어떻게 찾는지를 분명히 알고 있는 이는 별로 많지 않다.

비과학자는 물론 생명과학 분야 이외의 대부분 과학자들에게도 "생물학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여전히 남았다.

이런 맥락에서 『이것이 생물학이다』라는 책의 의미는 크다. 그것은 이 책의 저자가 철학·의학 및 자연사를 두루 공부한 96세가 넘은 학자로, 국제 생물학계에서의 대표적 학자라는 사실 때문만이 아니다. 이 저서의 더 중요한 의미는 '생물학교과서'나 '생물학사' '생물과학사'가 아니라 그 이상이라는 점이다.

생명의 의미는 무엇인가, 과학이란 무엇인가, 과학은 진보하는가, 진화에서 인류의 자리는 무엇인가, 진화는 윤리를 설명할 수 있는가 등 이 책의 몇 개의 장절(章節) 제목이 말해주듯이 그러한 문제에 대한 비판적 사유로서의 철학적 고찰을 하고 있다. 과연 책을 보니 그는 다양한 생명체들의 기원에 대해 창조론에 대립하여 진화론을 주장하고, 기계론적이며 이원론적 결정론에 맞서 우연적 창발(emergence)로 생긴 다원적 우연론으로 맞선다.

또 그는 자연과학과 인문사회학의 절대적 차이 즉 단절의 관계로 설정하는 것을 거부한다. 육체와 의식, 생물체로서의 인간의 진화와 개인의 도덕의식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고, 그 모든 문제의 해결이 인간의 책임임을 환기시킨다.

그의 이런 자연관을 '통합적 진화론'이라 부른다. 그가 말하듯이 "자연현상은 물론 공룡, 거대한 나무, 공작새, 난 등 온갖 기이한 생물들의 기원과 분포에 이르는 모든 생명현상들의 과학적 문제" 만이 아니다.

즉 윤리적·철학적 문제들도 모두 진화론적 관점에서 설명될 수 있다고 저자는 주장한다. 이런 점에서 생물학자이며 생명과학철학자인 마이어의 입장은 노벨화학상을 받은 생화학자 모노와 과학적으로나 철학적으로 동일하다.

그러나 생물현상은 물리현상의 경우처럼 분자로 환원시켜 설명할 수 없다는 점에서 모노와 구분된다.

자연현상은 단 하나 혹은 단 둘로 정확히 환원될 수 있는 본질들의 기계적 관계로 엮어진 것이 아니라 우연성·다원성·창발성·역사성에 의해 지배되었다고 주장한다. 생명계의 모든 속성이 최소의 구성요소들(분자·유전자)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책은 많은 정보를 쉬우면서도 재미있게 제공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이 저서에서 두 가지 일반적 가르침을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하나는 저자가 "종종 자신의 좁은 전공분야의 외부로부터 개념적인 진보의 결정적인 실마리를 얻는다"라는 말로 표현한 명제로서, 극도로 전문화된 분야에 종사하는 학자들에게 필요한 가르침이다.

또 하나의 가르침도 기억해 둘 만하다. "진화는 우리에게 개인적 필요를 넘어 보다 큰 집단의 필요를 포용할 수 있는 능력을 제공하고", "진화에 대한 이해는 세계의 미래를 위한 건전한 윤리체계의 기초가 될 수 있는 세계관을 제공한다"는 사실이다. 이 두 가지 점만으로도 이 책은 꼭 읽을 만한 가치가 있다.

박이문 연세대 특별초빙 교수·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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