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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산 유학사 정리하는 이원직 소장과 김기승 교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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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직 외암사상연구소장(왼쪽)과 김기승 순천향대 아산연구소장은 아산 유학사를 집대성하는 작업을 진행 중이다. [조영회 기자]

몇일 전 반가운 책 한 권이 우편으로 배달됐다. 외암사상연구소(소장 이원직)가 펴낸 『아산 유학의 여러 모습』(외연총서 3)이란 책이다. 이 연구소가 2007년 이후 아산의 유학사를 정리해 낸 세 번째 책이다. 이 소장과 책 편집 실무를 맡았던 김기승 순천향대 아산학연구소장을 만났다.

이 소장은 교수를 역임한 국문학자이고 김 교수는 한국사 전공자다. 최근 있었던 뉴스가 첫 화제로 올랐다.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이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올랐다는데 아산 외암민속마을은 어떻게 되는 건가요?”

이 소장이 말문을 텄다. “나는 되레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하회마을 등은 전형적인 한국의 양반마을 형태를 보여줘 채택됐다고 한다. 우리 외암마을은 그런 마을이 아니다. 양반과 평민이 큰 구별없이 몇 백년간 살아온 곳이다.”

김 소장이 거든다. “이 소장님, 외암마을은 양반댁 굴뚝이 특이하더군요. 굴뚝을 높이 세우지 않고 마루 밑으로 낮게 깔았어요.” “그건 말이죠~”하면서 이 소장이 답했다. 이 소장은 외암마을 조성의 주역인 예안 이씨 종친으로 이곳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내가 어릴적 어머님이 아침 반찬으로 생선을 구울 때 였다. 갑자기 할아버님이 ‘옆집(평민)에 초상이 났는데 어찌 고기를 굽는 호사를 부리냐’며 호통을 치셨다. 또 이웃 아들이 군대를 가면 반상(양반·평민)을 떠나 모두 무사귀환을 비는 글을 써 주곤 했다.”

연속 펴낸 아산유학 시리즈 3권.

김 교수가 “그러고 보니까 외암마을은 양반집과 평민집이 섞여 있다. 대개 양반집은 지대가 높은 데 지어 평민집들을 내려다 보고 있는데 여기선 그렇지 않다”며 맞장구 쳤다. 외암마을은 인공적인 요소를 절제하고 자연환경을 최대한 살린 마을이다. 이 소장은 “외암선생이 직접 지은 ‘외암기(記)’에 그런 마을 특징이 그대로 적혀 있다”고 말했다.

이 소장과 김 소장는 지난 수년간 ‘커플’처럼 일했다. 학술대회를 열고 그 결과를 책으로 엮어내 지역문화를 살찌운 주역들이다. 예안 이씨 문중 도움으로 2005년 11월 설립된 외암사상연구소는 외암 이간 선생을 중심으로 중앙이 아닌 지방에 토대를 뒀던 유학자들 생애와 사상을 살펴 왔다.

그 첫 결과물이 『조선시대 아산지역의 유학자들』(외연총서 1)이었다. 진사·생원 시험에 합격한 아산출신의 명단(사마방목)을 정리해 실었다. 덕수 이씨(이순신), 신창 맹씨(맹사성), 진주 강씨(강백년), 온양 정씨(정두경), 남양 홍씨(홍가신), 창녕 성씨 등 지역의 명문가들이 여실히 들어났다.

2년 후 『외암 이간의 학문세계』(외연총서 2)를 펴냈다. 이간(1677~1727)은 조선성리학 3대논쟁 중 하나인 ‘인물성(人物性)동이론(同異論)’의 한 축을 이끈 인물이다. 인성·물성은 같다는 인물성동론(同論)를 주창, 호락논쟁의 낙론(洛論)을 이끌었다.

-요즘 유학에 관심 갖는 주민들이 있을까요.

“맞는 말이다. 사는 데도 힘겨운 데 고리타분하게 여겨지는 지역 유학사에 관심을 갖겠는가. 그렇지만 중요한 일임에 틀림었다. 주민이나 지자체는 모두 눈에 금방 들어오는 것만 관심을 갖는다. 연예인들은 1억원 가까이 주고 초청하는데, 3000~4000만원 써서 학술대회 열고 책 내는 데는 인색한 게 현실이다.”(이)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렇다고 그 현상을 묵인하면 지역의 역사 문화를 살리고 발전시킬 수 없다. 멀리 봐야 한다. 아산에서 당대 유명한 유학자들이 많이 배출됐거나 머물며 공부했다. 당시 지방이라고 절대 중앙의 정치·문화에서 동떨어있지 않았다.”(김)

-구체적으로 말씀해 보시죠.

“외암 이간선생이 주장한 인물성동론은 당시 획기적인 주장이었다. 사람과 동물의 근본이 같다는 게 이해될 법한 말이냐. 이런 ‘시골학자’ 이간의 생각에 서울의 학자층이 박수를 보내며 찬동했다. 이후 이 사상은 실학 북학파에 연결되고, 이후 개화파 사상에까지 파급됐다는 데 학계가 수긍하고 있다.”(김)

-외암의 주요사상은 뭐가 있나요.

“외암은 인물성동론 이외에 ‘성범일체(聖凡一體)’를 내세웠다. 성인과 범인, 즉 양반과 평민을 일체라는 얘기다. 그 생각이 외암마을 건설에 그대로 투영돼 양반집과 평민집이 섞여 있는 것이다. 성인과 범인(평범한 사람)이 하늘과 땅 차이로 먼 게 아니라 범인도 성인이 될 수 있다는 얘기다.”(이)

-‘어려운’ 유학 책을 연속 펴내는 의미는.

“책을 내는 것도 문화행사다. 너무 일시적인 흥미 본위 문화행사에만 치중해선 안된다. 교육적이고 그래서 서서히 빨려드는 최면적인 문화행사에 투자해야 한다.(이) 당시 중앙까지 영향을 미친 아산지역의 유학사적 위치를 널리 알리고 싶다. 지역 청소년들이 이런 아산의 정체성을 알고 자긍심을 갖고 공부했으면 한다. 우리 고장에서 조선시대 인문학적 영재들이 많이 배출된 사실을 알아야 한다. 아산에서 형성된 외암사상이 향후 조선사회의 학문·정치 등 다방면에 많은 영향을 끼치고 있는 걸 봐라.(김)”

-외암사상연구소의 이런 작업이 아산에 어떤 기여를.

“아산을 한층 매력적인 도시로 만드는데 일조할 것이다. 독창성과 보편성이 공존하는 품격 높은 도시임을 알게 될 것이다. 인간과 자연의 조화를 가장 큰 가치로 여겼던 유학의 큰 학자(외암)가 계셨던 곳이다. 이 정신은 개발과 발전이 놀라운 속도로 이뤄지는 현재의 아산이 새겨야 할 가르침이다.” (이)

-이번 책엔 맹사성에 대해 모르던 사실이 담겨 있더군요.

“맹사성은 정치적으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26년 관직생활 중 절반 기간을 좌천·파직·유배 생활로 보냈다. 대사헌 벼슬에 있을때 태종의 사위(조대림) 역모사건 조사를 심하게 했다는 이유로 태종이 맹사성을 죽이려 했다. 하륜·권근 등 대신들이 말려 겨우 목숨을 건졌다. 당시 세자 양녕대군도 사부 맹사성의 인간됨을 알아 구명활동에 적극 나섰다. 특정 정치세력에 휩쓸리지 않고 비리에 전혀 간여하지 않았던 그의 삶이 자신의 목숨을 건지게 한 것이다. 요즘 정치인들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김)

-이후 어떤 책들을 발간할건지.

“김 소장과 더 상의해봐야겠지만, 외암사상이 시대에 맞는 정합성(整合性)을 찾아 변화 모습을 추적하고 싶다. 성리학에 굳건히 다리를 딛고 시대 여건 변화에 맞춰 정합성을 이뤄가는 사상 흐름을 짚어보고 싶다. 그리고 지역 토착 성씨들 중심으로 지역사를 되돌아 보려 한다.”(이)

글=조한필 기자
사진=조영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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