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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 수위 넘은 한국 TV 선정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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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일본의 1980년대 이야기를 해보자. 당시 일본 TV의 선정성은 지금의 한국보다 더했다. 지상파에는 낮 밤 가리지 않고 여성의 가슴이 아무렇지 않게 등장했다. 온갖 저질, 선정적 프로그램이 난무했다. 당시 일본에 있던 나는 ‘11PM’이란 프로그램 장면을 기억한다. 전국의 스트립 댄서들을 모아 놓고 누가 더 농염하고 선정적인 몸짓을 보이는가 겨루게 했다. 또 사이비 최면술사가 출연자에게 최면을 걸어 묘한 교성과 성 행위를 연상하는 몸짓을 유도하는 프로그램도 있었다. 일본 사회는 이런 TV의 선정성에 자연스레 물들어갔다. 변태적 퇴폐업소가 급증하고 ‘섹스 천국’이란 오명도 갖게 됐다.

20년 후. 일본에 다시 와 놀란 것은 그런 프로그램들이 일제히 자취를 감췄다는 점이다. 새벽 시간에 극히 일부 잔재가 남아 있지만 적어도 0시 이전, 청소년이 보는 시간대의 프로그램에서 선정성이란 찾아볼 수 없다. 이유는 뭘까.

한 민방의 간부는 “2001년 ‘청소년 유해 사회환경 대책법’이 만들어진 이후 선정적인 장면이 TV에 발을 들일 수 없게 됐다”고 말했다. 거센 반발도 있었다 한다. 방송사들은 숫자(시청률)가 확실히 나오는 프로그램을 포기하기 싫어 반대했다. 상당수 성인 남성들도 속사정은 다르겠지만 “표현의 자유를 뺏지 말라”고 저항했다. 하지만 이들도 꼼짝 못한 논리가 있었다. “당신 딸이, 아니면 당신 아들이 그로 인한 피해자나 가해자가 되면 좋겠는가.”

일본뿐 아니다. 2004년 수퍼보울 축하공연에서 재닛 잭슨이 가슴을 노출하자 미국의 연방통신위원회는 이를 실황중계했다는 이유만으로 CBS에 55만 달러(약 6억4000만원)의 벌금을 부과했다. 방송의 선정성을 재단하는 데는 미국 또한 가차없다.

한국의 여성가족부가 최근 발표한 수치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2008년 인구 10만 명당 한국의 성범죄 발생건수는 33.4건으로, 미국의 29.3건이나 일본의 6.8건을 앞섰다. 더 큰 문제는 발생건수의 증가율이다. 미국은 7.9%, 일본은 20%가 줄었는데 한국은 오히려 18% 증가했다. 최근 4년을 보면 69%가 늘었다고 하니 보통 심각한 게 아니다. 난 최근 한국 TV의 선정적이고 자극적인 노출이 이에 큰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근본적 대책이 필요하다. ‘12세 이상 시청가’를 ‘15세 이상 시청가’로 바꾸는 식의 미봉책은 어림없다. 꿀벅지, 엉짱 등의 몰상식한 용어를 양산하고 섹시댄스로 범벅인 TV에는 가차없이 ‘레드카드’를 내밀 때다. 우리 딸, 우리 아들이 그로 인한 피해자, 가해자가 되기 전에 말이다.

김현기 도쿄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