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장취재수해지역사람들]"겨울 코앞인데…" 컨테이너 신세 한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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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태풍 '루사'가 휩쓸고 간 지 석달째로 접어들었다. 폐허가 되다시피 한 강원도 영동지역과 충북 영동군 일대에선 아직도 2천여가구의 수재민들이 컨테이너에 의지한 채 겨울나기를 걱정하고 있다. 추위가 눈앞에 다가왔지만 자금과 토지가 부족해 집짓기는 막연하기만 해 수재민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물에 잠겼던 장롱을 뜯어내 지붕을 보수하고 문짝을 만드는 심정을 누가 알겠어. "

31일 오후 태풍 '루사'로 30가구 가운데 22가구가 물에 씻겨 내려갔던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하거노리.

무너진 교량, 그 옆에 흙으로 아슬아슬하게 연결된 임시 다리, 천막과 판자 등으로 바람막이를 더덕더덕 붙여 댄 컨테이너 집들, 세숫대야와 빨랫감 등이 널려 있는 컨테이너 집 내부는 수재민들의 고달픈 삶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이 마을 위쪽인 상거노 1리에 들어서자 곳곳에서 터파기 공사를 끝내고 주택골조 공사가 한창이었지만 아무리 따져봐도 본격적인 추위가 닥치기 전에 일이 마무리될 것 같지 않았다.

마을 주변의 밭들은 산에서 빗물에 휩쓸려 내려온 나뭇가지와 흙더미들로 아직까지 어지러웠다.

50여일째 컨테이너 생활을 하고 있는 이 마을 김진만(74)할아버지는 "컨테이너의 외풍이 워낙 드세 겨울을 넘길 수 있을지 걱정"이라며 "다리가 끊겨 생필품을 사려면 면(面)까지 10리는 돌아가야 할 판"이라고 한숨을 지었다.

충북 영동과 경북 김천 지역도 실정은 비슷했다.

충북 영동군 영동읍 예전리 주민 30가구는 상습 수해 지역인 하천변 부지에 대한 성토 작업이 계속되고 있어 기약없이 컨테이너에서 생활하고 있다.

정부와 지방자치단체들은 오는 12월 중순까지 수재민들에게 새 집을 마련해 준다는 방침이지만 상당수 수재민들은 컨테이너에서 이번 겨울을 보내야 한다.

강원도·경북도·충북도에 따르면 태풍 루사 피해로 새 집을 짓겠다고 신청한 수재민은 2천8백53가구.

그러나 31일 현재 91가구만 조립방식으로 주택을 완공해 입주했다. 공사가 진행 중인 가구수도 9백53가구에 불과하다.

나머지 1천8백9가구는 신축 부지를 확보하지 못했거나 신축 자금 부족 등으로 착공조차 못하고 있다.

남의 땅이나 하천부지 등에서 살고 있던 수재민들은 땅 소유주로부터 부지 사용 승낙을 받거나 새로운 부지를 물색해야 하는데 사정이 여의치 않기 때문이다.

강릉시 강동면 산성우리 주민들의 경우 27가구 중 8가구가 땅 주인이 주택 신축을 허락치 않아 주택 신축 계획조차 세우지 못하고 있다.

건축 수요가 한꺼번에 몰리면서 건축비와 자재값이 오른 것도 수재민들의 새 집 마련에 어려움을 준다.

김준회(65·강릉시 유천동)씨는 "정부에서 건축비를 평당 1백80만원으로 책정했지만 콘크리트 적벽돌 집을 지으려면 최소한 2백70만∼2백80만원은 들어 착공도 못하고 있다"며 한숨을 지었다.

일선 시·군에서 마련해 준 5.5평 크기의 컨테이너 집은 전기장판과 이불·담요·주방세트 등 최소한의 생활여건만을 갖추고 있다. 온수 공급이 되지 않아 세탁이나 샤워는 엄두도 못낸다.

해당 지자체에서는 겨울이 오기 전에 수재민들이 새 집에 입주할 수 있도록 공사 기간과 공사 비용을 줄일 수 있는 조립식 주택 신축을 적극 권장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수재민은 건축기간이 2∼3개월 이상 필요한 콘크리트 적벽돌 등 양옥집을 선호해 컨테이너 집에서 겨울을 나야 할 형편이다.

이에 강원도 측은 "실내 공동 빨래터·샤워장과 지붕 덧씌우기 등 보온대책을 마련 중"이라고 밝혔다.

올해 농사를 망친 농민, 셋방살이 수재민, 상점이 침수된 소상인들의 하루 나기는 버겁기만 하다.

마을 주 소득원인 포도밭을 모두 망친 충북 영동군 산촌면 동대리 주민 50여명은 지난 26일 대책회의를 열었지만 절망만 확인하는 자리가 됐다.

포도밭을 복구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당 1천원은 드는데 정부에서 책정한 지원금은 7백원에 불과해 사실상 손을 댈 수가 없기 때문이다.

전국에서 밀려들었던 자원봉사자들의 발길도 추석 이후 뚝 끊겼다. 강릉지역 논의 벼베기 실적은 65%에 불과해 농작물 수확에 비상이 걸린 상황이다.

신종승(64·강릉시 강동면 하시동3리)씨는 "아직 벼베기조차 끝내지 못한 상태에서 새 집을 짓는다는 것은 허황된 꿈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75평의 창고와 상가가 모두 물에 잠겨 4억5천여만원의 손해를 봤다는 김재일(36·동해시 부곡동)씨는 "24평짜리 아파트를 담보로 소상공인 자금 5천만원을 신청했지만 아직 신용보증기금에서 실사조차 나오지 않아 답답할 뿐"이라며 목청을 높였다.

루사로 피해를 본 강원도 9개 시·군의 소상공인들에게 책정된 지원금은 1천억원에 이르고 있지만 지금까지 지급된 액수는 1백50억여원에 불과하다.

이에 정부는 지난 27일 '수해복구 점검회의'를 열어, 주택신축 행정절차를 간소화하고 컨테이너마다 전기히터·순간온수기를 공급한다는 등 긴급 대책을 마련, 즉각 시행키로 방침을 정했다. 하지만 수재민들은 이 또한 공허한 대책으로 끝날까봐 불안하게 지켜볼 뿐이다.

홍창업·안남영·홍권삼 기자

hongup@joongang. co. 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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