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전으로 밀려난 여성관련 예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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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한국인은 유행에 민감한 편이다. 인터넷 보급률 세계 1위가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21세기는 여성의 시대라지만 여성 관련 예산은 유행에 둔감해 그 증가율이 제자리 걸음이다. 정부 일각에서는 예산의 절반이 여성에게 쓰여진다고 주장하면서 여성 관련 예산을 별도로 언급하는데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다. 과연 예산의 절반이 여성에게 사용되고 있으며, 별도로 여성 관련 예산을 점검할 필요 없이 우리 사회는 남녀평등이 이뤄지고 있는 것인가.

우리나라 국민이 현실에서 체감하는 남녀평등 정도를 살펴보자. 지난해 여성부에서 실시한 가정생활과 직장생활에서 일반 국민이 체감하는 남녀평등 실현 수준은 1백점 만점에 각기 62.5점, 54.6점으로 낮게 나타났다.

남녀평등지수가 낮은 우리 사회에서는 남녀평등을 위한 정책이 발전해야 하고 그에 따른 예산이 확충돼야 한다. 여성 정책을 직·간접적으로 담당하는 부처의 여성 관련 예산을 분석하면 1999년 이래 2002년까지 0.28% 정도로 변동이 없다. 지자체 여성 관련 예산 역시 함량 미달은 마찬가지다. 이는 한국여성들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읽을 수 있는 수치로서 '여성의 시대'가 허울뿐임을 실감할 수 있다.

국가 예산은 국가의 정책 의지와 정책 실행 정도를 보여주는 척도다. 정부가 아무리 양성 평등 정책을 입안해도 이를 위한 적절한 예산 조치가 없다면 양성 평등의 정책 실행 정도는 낮을 수밖에 없다. 이러한 이유로 최근 유엔 등 국제기구에서는 양성 평등 정책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예산 편성, 집행과 평가 과정에 성 인지적 관점을 도입시키는 젠더 예산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젠더 예산 분석은 현재 세계 20여개 국가에서 이뤄지고 있는데 필리핀의 경우 외국 원조기금 및 일반예산의 5%를 '젠더와 발전 예산'으로 책정하고 있다.

양성이 평등한 사회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서는 여성의 욕구가 무엇인가를 파악해 그 욕구를 정책과 예산에 반영해야 한다. 여성부 조사에 따르면 현재 여성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취업이다. 그 여성들은 취업 장애 요인으로 육아 부담(29.3%), 사회적 편견, 차별적 관행 및 제도(28.2%), 불평등한 근로 여건(12.5%) 등을 꼽고 있다. 2003년도 정부 예산안을 보면 보육 예산을 확충한 것을 제외하고 이러한 여성들의 욕구가 반영되지 않아 유감이다. 여성인력개발센터 보강, 남녀 평등의식 확산, 여성 발전기금 조성 사업은 전년도 수준이거나 전년도에 비해 삭감됐는데 정부 안보다 두세 배 증액해야 하고, 전년도보다 삭감된 성매매 방지 및 보호사업 역시 문제의 심각성으로 볼 때 훨씬 증액해야 할 것이다.

여성 관련 예산이 뒷전으로 밀려 성적 불평등이 개선되지 않는 악순환이 반복되지 않기 위해서는 중·장기적 재정 수요와 재원 마련 계획을 수립하고 매년 일반회계에서 일정 비율 이상을 배정하도록 해야 한다. '여성의 시대'에 걸맞은 성 평등의 실질화를 이뤄내기 위해서는 기획예산처 내에 여성정책담당관실을 설치해야 한고, 여성부와 기획예산처가 공동으로 여성 관련 예산의 개념과 범위를 정립하기 위한 연구부터 시작할 것을 제안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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