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시 실리바둑이 승리 묘약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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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실리(先實利)후타개(後打開).'

먼저 실리부터 취한 후 상대의 공격을 빠른 스피드와 임기응변으로 잘 피해 승리하는 바둑 스타일 또는 전법을 말하는데, 17세 소년기사 박영훈3단이 베이징(北京)에서 열린 농심신라면배에서 중국과 일본의 최강자 4명을 이 전법으로 연파한 이후 새롭게 조명을 받고 있다. 바둑판 위에서 실리는 흔히 현금에 비유되고 세력은 신용이나 인격 같은 무형의 가치에 비유된다.실리와 세력은 그래서 서로 대립되지만 동등한 가치를 인정받아왔다.

하지만 대부분의 일류들은 실리바둑일 뿐만 아니라 바로 앞서 말한 '선실리 후타개'의 전법을 즐겨 사용하고 있다. 경쟁이 치열해지면 치열해질수록 대세력바둑이나 공격바둑은 낭만적인 고전으로 변해가고 있다. 실리야말로 현실적으로 왕자이기 때문인데 이것은 현실사회에서 돈의 가치가 다른 가치들을 눌러버린 현상, 또 현금이 많은 사람들이 승리하는 현상과 많이 닮아있다. 바둑판은 역시 세상의 축소판인 것인가.

박영훈3단은 자신의 바둑 스타일에 대해 "그동안 내 바둑이 실리바둑이란 느낌은 없었는데 이번 중국에서는 대부분 실리를 취한 뒤 타개에 성공해 승리했다"고 말했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 스타일이 변했다는 것이다.

빠른 발걸음으로 실리부터 취하면 자연 엷어진다. 바둑에서 두터움은 좋은 것이고 엷음은 나쁜 것이다. 왜냐하면 엷음은 약점이 있다는 의미고 상대의 노림과 공격을 유발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오래된 바둑 이론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실리를 취한 뒤 엷음을 능숙한 임기응변과 타개술로 이겨내는 것이 승리의 지름길이 되고 있다. 고수들은 본능적으로 이걸 알기 때문에 처음 세력적인 기풍을 지녔던 사람들조차 점차 실리 쪽으로 방향을 틀고 있다.

박영훈3단은 조훈현9단의 기풍에 대해 "빠르다. 실리바둑이다"고 말한다. 조9단이 끝없이 싸우고 흔드는 스타일로 바뀌었다지만 본질은 여전히 실리를 차지한 뒤 상대의 공격에 맞서 타개한다는 분석이다.

이세돌3단에 대해서는 "빠르기보다는 두텁다는 느낌을 주는데 역시 포진에서 실리를 중시한다"고 말한다.이세돌 또한 전투로 유명하지만 그가 싸우는 이유는 상대가 실리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조치훈9단은 실리를 취한 뒤 남의 세력권에 푹 뛰어들어 집을 부숴버리기 때문에 '폭파전문가'란 별명을 얻었고 서봉수9단 역시 유명한 실리바둑이다. 그들 일류는 본능적으로 '실리의 우위'를 통찰했던 것이다.

공격보다는 수비가 쉽다.공격은 스케일을 요구하지만 수비는 임기응변과 감각이 뛰어나면 된다.더구나 소비시간이 줄어드는 추세에서 웅대한 스케일을 갖기는 어렵다.

이창호9단은 어렸을 때 느리고 두터운 행마로 유명했지만 점차 실리적인 바둑으로 방향을 틀어왔다.유창혁9단은 뛰어난 공격수로 보기 드문 공격바둑을 구사하고 있는데 그의 스타일은 머지않아 일본기사 다케미야(武宮正樹)9단의 우주류와 함께 고전으로 남게 될 것 같다.아직 젊은 유9단이 실리로 방향을 틀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박치문 전문기자 dar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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