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7년 출범 GATT 95년 WTO로 제모습 갖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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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세계 자원의 완전 이용과 생활수준 향상을 위해 모든 무역장벽을 허물고 국제무역상 차별조치를 폐지한다. "

1947년 10월 30일, 제2차 세계대전 승전국을 주축으로 한 자본주의 진영 국가들은 스위스 제네바에 모여 이 같은 내용의 세계 무역 질서를 구축하기로 했다. 당시 자국의 이익만 꾀하는 보호무역주의가 제2차 세계대전 발발에 크게 작용했다는 인식이 퍼져 자본주의 진영만이라도 무역장벽을 낮춰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됐다.

이에 칠레·호주 등이 동조해 미국과 영국·프랑스가 주도하는 23개국은 오늘날까지 세계무역 질서의 근간이 돼온 관세 및 무역에 관한 일반협정(GATT)체제 출범에 뜻을 모았다.

그러나 GATT 출범 이후에도 크고 작은 무역분쟁이 꼬리를 물었다. 관세를 낮추고 무역장벽을 허무는 것이 공동의 이익이라는 원론에 찬성해 GATT를 출범시켰지만, 어느 나라나 남의 나라 시장에만 군침을 흘렸을 뿐 자국의 문호를 굳게 걸어잠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관세를 일괄적으로 낮춰 최대한 무역장벽을 낮추고 ▶다자주의적 상호주의를 채택해 이해당사국간 협상 결과를 전 참가국에 동등하게 적용하도록 한 규정은 유명무실해졌다. 세계 무역 규모가 증가하면서 지구촌의 무역분쟁은 오히려 증가했고 더욱 첨예해졌다. 선진국에선 차별적 비관세 장벽이 더욱 확대됐다. 미국의 통상법 수퍼301조가 그 대표적 사례였다. 덤핑이나 보조금 등 불공정한 방법에 의한 수출에 대해선 선별적 규제를 허용한 GATT의 맹점을 교묘히 이용한 것이다.

다자주의적 상호주의에 따라 참가국이 한 자리에 모여 협상안을 도출하는 원탁회의(라운드 테이블 미팅)가 GATT 체제에서 일곱 차례나 열린 것도 이 때문이다. 이 중 60년대 케네디 라운드와 70년대 도쿄 라운드는 관세율을 일괄 인하해 GATT 체제의 성과로 평가받기도 했다.

하지만 GATT 체제는 1백17개국이 참가한 우루과이 라운드(UR)에서 결국 한계를 드러냈다. 관세 인하와 비관세 장벽을 주요 의제로 다루는 신사협정에 불과한 GATT 체제로는 지적재산권 보호와 서비스 무역 자유화 등 새로운 유형의 분쟁을 조정할 실질적 기구와 제제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한계가 나타남에 따라 UR 타결 막판에 창설키로 한 것이 95년 출범한 세계무역기구(WTO)체제다. GATT의 22개 부속협정을 모두 수용하고 법적 구속력도 갖췄다. 종이 문서에 불과했던 GATT가 각료회의와 이사회를 갖춘 국제기구로 거듭난 것이다. 달라진 게 있다면 시장을 더욱 폭넓게 예외없이 개방해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상황이 바로 WTO 체제 속 첫 다자간 협상인 뉴라운드(도하개발프로젝트:DDA)에 철저히 대비해야 하는 까닭이다.

김동호 경제연구소 기자

e-new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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