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돈관리:李 난 몰라형 盧 제살 깎기형 鄭 짠돌이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5면

◇"차라리 내돈 쓰고 말지"=한나라당 이회창 후보와 민주당 노무현 후보에겐 "측근은 있어도 가신은 없다"는 말이 있다.

정치자금 수급을 매개로 맺어진 가신이 없다는 뜻이다. 정몽준 후보도 좀처럼 돈을 쓰려 하지 않는다.

李후보는 자기 손에 '돈 때'를 묻히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는 편이다. 때문에 李후보의 주변인물들은 가끔 정치자금을 내놓는 측으로부터 '배달사고'를 일으킨 게 아니냐는 의심을 받기도 한다.

한 중진의원은 "중앙당 후원회를 앞두고 잘 아는 재계인사로부터 적지 않은 후원금을 받아 당에 입금한 뒤, 李후보에게 '후원인에게 돈을 잘 받았다는 전화 한 통만 넣어달라'고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고 전했다.

그는 "후원인이 상황 설명을 듣곤 '이해한다'고 했지만, 내가 배달사고를 낸 것으로 비칠 수도 있겠다 싶어 찜찜했다"고 말했다.

97년 대선 막바지에는 후보 방에서 열린 선거대책회의에서 실탄(선거자금)부족 문제가 논의되자 李후보는 슬그머니 일어나 내실로 들어가 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상태로 5년이 흐르자 요즘 한나라당에선 李후보에게서 돈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 "차라리 내돈을 쓰고 말지"라는 말을 한나라당 주변에선 종종 들을 수 있다.

당 관계자는 "李후보가 3金씨처럼 직접 정치자금을 끌어모았다면, 현 정권과 정면 대결하면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카드정지 안 당한 사람 없어=민주당 盧후보도 정치자금에 대한 결벽증이 상당하다. 쪼들리는 것은 李후보보다 더한데도 盧후보는 돈을 모아오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盧후보 진영의 핵심인사 중 신용카드 정지를 당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없을 만큼 '제살 파먹기'가 일반화돼 있다.

당내 후보경선이 한창이던 지난 봄, 대구·경북지역을 담당했던 이강철 특보는 부인이 운영하던 횟집을 처분해 9천만원을 만들어 활동비로 써야 했다.

盧후보는 당시 후원회가 모았던 2억원과 자신의 카드로 경선자금을 썼다고 한다. 그의 정지당한 카드는 캠프의 살림살이를 챙겼던 염동연 특보가 나중에 풀어줬다.

천정배(千正培)의원은 盧후보가 민주당의 정식후보로 선출된 뒤 盧후보의 혜화동 자택을 조용히 찾아가 "이제 정치자금이 많이 들게 생겼으니, 盧후보가 싫으면 내가 자금을 모을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지만 거절당했다. 盧후보는 지금도 캠프 내부회의에서 돈 얘기가 나오면 입을 다문다고 한다.

◇"아버지 전철 안 밟을 것"=정몽준 의원은 현재까지 창당과 대선에 필요한 돈을 자기 호주머니에서 내놓고 있다. 아버지 정주영(鄭周永)씨는 92년 대선출마 때 천문학적인 돈을 썼지만 그는 전철을 밟지 않겠다고 한다.

재벌 2세인 鄭의원이 자기 돈은 묶어두고 남에게 손을 벌리기도 마땅치 않을 것이다.

쓸 데는 많고, 나올 곳은 한 군데밖에 없는 자금환경 때문일까. 그는 '국민통합 21'의 지출명세를 아무리 작은 규모일지라도 일일이 챙기고 있다. 돈에 관한 한 권한위임은 없다.

이회창 후보는 정치자금 문제에 손대지 않으려 하고, 노무현 후보가 제살 파먹기를 마다하지 않는 쪽이라면, 정몽준 의원은 남에게 헛돈 안쓰고 자기 사람들에겐 내핍을 요구하는 유형이다.

鄭의원은 과거 국민당 활동을 같이 했던 한 현역의원을 영입하려다 그로부터 "돈을 얼마쯤 쓰려고 하느냐"는 질문을 받곤 더 이상의 접촉을 끊었다. 현역의원들의 세(勢)가 鄭의원에게 모일 듯 안 모이는 이유 중의 하나가 기대수준 이하의 돈씀씀이 때문이라는 것은 정치권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鄭의원의 내핍 요구는 캠프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3천1백50원짜리 식권'을 나눠주는 데로 이어진다.

그런 鄭의원은 최근 사석에서 "중앙당이 창당되면(11월 5일) 그때부턴 돈을 좀 쓸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모으는 데 미숙, 쓰는 데 인색=3김시대 정치지도자는 재계 회장들과 1대1 면담을 통해 자금을 만들기도 했고, 이 자금을 적절히 사용하면서 정치세력을 형성했다.

이회창·노무현 후보가 돈을 모으는 데 능숙하지 못하고, 정몽준 의원이 돈을 쓰는 데 인색해 보이는 것은 3김시대 기준으로 보면 생소한 모습이다.

이회창 후보는 직접 돈을 만들지는 않지만 주변에 재력가를 포진해 이들을 활용한다. 비교적 자금사정이 넉넉한 사람을 자주 비서실장으로 발탁하는 것이 그 예다.

주진우(朱鎭旴·사조그룹회장)·김무성(金武星)의원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사실상 李후보를 위한 정치적 모임에 자기 돈을 쓰면서 李후보에게 충성심을 보이곤 했다.

김진재(金鎭載)·신영균(申榮均)의원 같은 수백억원 이상의 재력가들도 李후보를 대신해 돈을 쓰는 일이 적지 않다.

李후보는 또 지난 9월 중국을 방문할 때 교민리셉션 등에 소요된 비용은 수행의원들이 1천만원씩 갹출해 충당했다.

물론 지난 1월 미국 방문 때처럼 다른 의원들과 똑같이 제비용을 대는 적도 있다.

노무현 후보는 돈에 대한 개념이 별로 없는 듯하다. 그는 젊은 시절 속칭 '잘나가는 변호사'였다.

그러나 30대에 운동권 학생들과 접촉하면서 모은 돈을 쓰기 시작했고, 빚보증도 많이 섰다. 아들 노건호씨는 "아버지가 생계를 외면하고 운동에 몰두하는 바람에 어머니와 자주 다퉜다"고 전했다.

그는 90년 통합민주당 시절엔 장기욱(張基旭)전의원을 위해 집을 저당잡히고 2억원 보증을 섰다가 낭패를 봤다.

92년 대선 때는 김대중 후보의 청년특위 위원장으로 활동하다 남은 돈 1억원을 고스란히 당에 반납하기도 했다. 96년엔 역시 같은 당 원외위원장이 보증을 서달라고 해 응했다가 손해를 봤다.

결국 그는 여의도의 아파트를 팔아 지금의 혜화동 집으로 규모를 줄여 이사가야 했다.

혜화동 집이 부인 권양숙씨의 명의로 돼 있는 것도 더 이상 盧후보가 함부로 집을 담보잡혀 빚보증을 서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반(反)노무현파로 알려진 민주당 유용태(劉容泰)사무총장은 盧후보의 비현실적인 돈감각을 꼬집었다. "盧후보는 자꾸 당 재정권을 자기 쪽에 넘기라고 하지만, 그러면 자기가 당 직원들에게 월급을 줄 수 있나. 그는 능력이 없어. 지금까지 盧후보는 당에 1백원 한푼 낸 적이 없다"는 게 劉총장의 말이다.

정몽준 의원은 재벌 2세로 성장했지만 일상생활에서의 돈 씀씀이는 의외로 짜다. 그와 식사를 같이 한 의원들 중엔 "鄭의원이 음식점에서 돈을 안내고 나가더라"고 하는 사람도 있다. 술자리에서 조용히 사라지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한 측근은 "鄭의원이 짠돌이여서가 아니라 적은 돈을 직접 내는 데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고 했다.

鄭의원은 또 재산의 90% 이상인 현대중공업 주식은 그가 대선출마 선언 때 한 약속대로 신탁법상 '신탁'에 묶여 있어 처분할 수 없다.

鄭의원 측이 공식·비공식으로 밝힌 바에 따르면 鄭의원의 현금보유액은 지난해 정주영씨에게서 받은 상속액 28억원과, 올해 현중 주식지분 11%를 유지하기 위해 교보생명에서 대출받은 자금에서 남은 30억원쯤으로 추산되는 돈이 거의 전부인 것 같다.

鄭의원이 자기 재산에서 이 수준 이상의 자금을 조달할 경우 출처의혹에 시달릴 수 있다. 재산이 많아 자금조달 문제에 더 세심하게 신경써야 하는 '정몽준의 역설'이다.

전영기 기자

chunyg@joongang.co.kr

1천6백억원(鄭夢準)과 12억원(李會昌)과 8억원(盧武鉉).

대선주자 '빅3'의 개인재산은 하늘과 땅 차이다. 재산만큼이나 이들의 돈에 대한 가치관과 정치자금을 끌어모으고 쓰는 방식의 차이는 크다. 하지만 공통점도 있다. 정치자금에 대한 이들의 접근방식에는 '두 金씨와는 달라야 한다'는 강박관념 같은 것을 찾아볼 수 있다.

김영삼(金泳三)전 대통령의 돈은 '먼저 보는 사람이 임자'라고 할 정도여서 '정치자금의 정거장'이란 소리를 들었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들어온 정치자금을 한푼 한푼 손수 관리한 것으로 유명하다. 어쨌든 정치자금의 중심에 그들이 있었고, 이를 받고 쓰는 과정에서 가신(家臣)집단이 심부름을 했다.

현재까지 나타난 바로는 '빅3'의 용전술은 두 金씨로 대표되는 과거 정치집단과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대선이 임박한 지금에도 그들이 정치자금을 흥청망청 쓰는 분위기는 포착되지 않는다. 정치자금을 적게 쓴다는 것은 당선 후에 '빚'을 갚아야 할 대상이 적다는 말과 통한다. 정경(政經)유착의 가능성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얘기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