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백년전 韓·日 역사 '미스터리'-"日 법화종 종정은 선조의 장손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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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조선의 14대 임금 선조(1552~1608, 재위 1567~1608)의 장손자가 임진왜란(1592~1598)때인 1593년 일본에 인질로 끌려가 저명한 승려로 활약하다 고국을 그리워하며 생을 마감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원광대 한국문화학과 양은용 교수는 최근 조선의 역사에선 아직까지 기록이 발견되지 않는 이같은 주장을 내놓아 학계와 문중이 논란에 휩쓸릴 조짐이다. 양교수가 찾아낸 일본의 자료에는 선조의 장남인 임해군(1574~1609)의 아들 태웅(太雄,1589~1665)이란 인물이 나온다. 일본 법화종(法華宗)의 대표적 고승으로 손꼽히는 일연(日延)스님이 태웅이란 기록도 보인다.

임해군은 동생인 광해군(1575~1641, 재위 1608~1623)에 의해 역모로 몰려 사약을 받았다. '조선왕조실록' 등에 임해군에 대한 기록은 나오지만 그의 아들 태웅에 대한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따라서 일본의 자료가 사실이라면 4백년 전에 누락된 조선 왕손의 역사가 새롭게 밝혀지게 되는 것이다.

일본에서 8년간 불교 사상사를 공부한 양교수는 '일연스님 환국추진위원회'회장을 맡으며 지난 23일 일본의 묘안사(妙安寺)에 안치돼 있던 일연의 얼굴상을 한달간 빌려오는 형식으로 한국에 들여와 전북 전주의 금산사(金山寺)에 안치했다. 일연의 얼굴상을 모시고 선조·임해군의 묘소와 종묘·덕수궁, 그리고 전주 이(李)씨 시조묘에 참배도 했다. 이 얼굴상을 본떠 한국의 은행나무로 전신상을 만들어 25일 금산사에 새로 안치하기도 했다.

그런데 조선에 있었다면 광해군이 폐위당할 때(1623년) 왕위 계승 후보였을 수도 있는 왕손이 포로로 붙잡혀 있었다는 사실이 조선의 사료에 전혀 언급되지 않을 수 있을까.

<오른쪽 박스 참조>

먼저 양교수의 주장을 좇아가 보자. 일본에서 일연의 행적은 두 개의 경로를 통해 드러났다. 하나는 임진왜란 당시 일본 장군들의 집안에 내려오는 기록이다. 대표적인 것이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것이다. 가토는 임진왜란 때 함경도에서 임해군과 그의 장녀·장남을 생포했다. 일본과 협상에 의해 임해군은 풀려나지만 장녀·장남은 일본에 볼모로 잡혀갔다. 당시 4세였던 장남이 일연스님이고, 6세였던 장녀는 이후 우키다(宇喜多)가문의 중신 도가와 다쓰야스(戶川達安)의 측실이 되었다고 한다.

일연의 행적이 나오는 두 번째 경로는 불교 사찰이다. 일연은 13세 때 법성사(法性寺)에서 출가했다. 법명은 대응(大應)이다. 일연은 법화종의 최고 존칭인 상인(上人)에 부여하는 별호다. '큰 스님'이란 의미의 '상인'을 붙여 일본의 기록에는 일연상인(日延上人)이라고 부른다.

'일연종(日蓮宗)사전'에는 일연에 대해 "조선 선조의 장자 임해군의 아들"이라고 기록해 놓았다. 일연은 16세부터 3년간 교토(京都) 본국사(本國寺)에서 공부했고, 다시 지바(千葉)현 반고사(飯高寺)에서 석·박사 과정에 해당하는 공부를 했으며 마침내 지바현 탄생사(誕生寺)에서 법화종의 종정에 해당하는 제 18세 법주(法主)가 되었다. 양교수에 따르면, 일연스님은 72세 때 고국 조선이 보이는 장소를 물색하다 후쿠오카(福岡)의 물가 언덕에 묘안사를 창건하고 5년간 거처하다 1665년 1월 26일 세수 77세로 입적했다.배영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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