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죄부용 '도청 國調'하자는 건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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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국정원의 도청(盜聽)의혹 확인 및 검증을 위해 국회 국정조사를 실시한다는 양당 총무 합의가 첫날부터 삐걱거리고 있다. 도청 국정조사의 방법·절차 등을 정해야 할 정보위원회에서 민주당 측이 말을 뒤집으며 딴소리를 하기 때문이다. 불과 몇 시간 전 합의문에 서명하고도 이를 뒤집고 자기네가 생각한 조사는 이런 게 아니라는 태도로 나오니 한심한 일이다. 이런 자세로 설령 국정조사를 해본들 도청 여부를 어떻게 파헤칠 것인가.

도청 불안에 시달려온 많은 국민은 이번 기회를 통해 진상이 분명히 밝혀지고 문제점이 개선된다면 여간 다행이 아니라며 여야총무의 합의를 반겼다. 그러면서도 자칫 준비 안된 상태의 부실 조사로 인해 도청에 대한 면죄부나 줄지 모른다며 걱정했는데 유감스럽게도 예측은 빗나가지 않고 있다.

도청 국정조사 전격 실시 합의는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이 '4천억원 의혹' 등 민감한 현안을 잇따라 추궁하며 국정원의 도청자료에 근거한 것이라고 폭로한 데서 비롯했다. 특히 鄭의원이 제기한 의혹이 세간에 널리 알려지면서 도청공포증으로 확산되자 정부와 민주당은 곤혹스러운 상황에 몰렸고, 한나라당의 국정조사 제의를 수용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하지만 우리는 엊그제 국정원장이 "무제한 조사를 받겠다"고 호언하며 도청사실을 부인했을 때 내심 뭔가 기대를 했다. 여기에 민주당까지 국정조사에 응하면서 이젠 도청 유무에 대한 확실한 조사 결과가 나오리라 기대했던 것이다. 그러나 기대는 처음부터 어긋나고 있다. 무제한 조사는 현장검증을 의미할 뿐이라면서 증인·청문회도 없는 국정조사를 하자는 쪽으로 선회하고 있다. 전문기관의 인력과 장비 지원을 받아야 하므로 국정조사를 원용했을 뿐 일반적 의미의 국정조사를 하자는 게 아니라고 발뺌하고 있다.

이래서는 의혹만 더 부풀리게 된다. 국가 안보를 훼손하지 않는 한에서 국정조사는 엄정하고 단호하게 이뤄져야 '도청 공화국'의 오명을 벗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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