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력 신경안정제·금지 화학무기 추정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1면

러시아 특수부대가 모스크바 돔 쿨트르이 극장 인질극 진압 작전에 사용한 특수가스의 정체를 둘러싸고 논란이 일고 있다.

억류돼 있던 인질 중 무려 1백18명이 사망한 데 대해 러시아 정부는 탈진 상태에 있던 인질들이 전격적인 진압 작전에 의한 쇼크와 심장마비 등으로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일부 의사는 특수부대가 살포한 가스가 기도를 막아 숨졌을 가능성이 있다며 독가스 살포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모스크바 시내 병원 관계자들은 "4∼5명만이 총에 맞았을 뿐 대부분의 환자들이 가스 중독 증세를 보이고 있다"고 밝혀 이같은 의혹을 증폭시키고 있다.

러시아 당국은 이번에 사용한 가스가 '특수가스'라고만 밝힐 뿐 가스의 종류에 대해서는 함구하고 있다. 영국의 로이터 통신은 "입원한 인질들을 진찰한 의사들이 아직 가스의 종류를 밝혀내지 못해 환자들에게 정확한 처방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면서 "무장한 인질범들을 순간적으로 무력화하기 위한 강력한 화학물질임에 틀림없다"고 보도했다.

이런 가운데 미국 AP통신은 미 독극물 전문가와 군사 전문가들의 말을 인용, "러시아 특수부대가 강력한 신경안정제인 발륨(디아제팜의 상표명)이나 BZ가스 같은 환각제를 농축해 분사했을 것"이라고 27일 추정했다.

워싱턴 포스트도 이날 "화학무기금지협약(CWC)은 BZ가스 같은 환각제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면서 "러시아 진압군이 이번에 사용한 가스는 CWC가 금지한 화학무기일 가능성이 있다"고 보도했다.

발륨은 미국에서 개발된 비치사성(非致死性) 신경안정제로, 호흡장애와 구토·시각장애 등을 일으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발륨을 흡입하면 또 졸음이 몰려와 정신이 몽롱해지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중에 기억하지 못하는 증상이 나타난다. 풀려난 인질들은 "갑자기 졸음이 몰려와 의식이 몽롱해졌으며, 가스가 분사되는 느낌이나 화학약품 냄새, 최루가스 같은 외부 자극은 없었다"고 증언하고 있다. 발륨과 마찬가지로 졸음과 환각상태를 일으키는 농축 BZ가스의 경우 수시간에 걸쳐 인체에 침투하기 때문에 즉각적인 반응을 기대하기는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일부 전문가는 러시아가 새로 개발한 화학무기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논란이 증폭되자 가스 사용의 불가피성을 강조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인질범들이 자폭용 폭탄을 몸에 두르고 있는 상황에서 이들을 일시에 무력화하기 위해서는 가스를 살포할 수밖에 없었다"며 유족들에게 사과했다.

모스크바·서울=안성규·박소영 기자

askme@joongang. co. 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