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에 대한 물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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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미국 유학생 황대권은 함께 공부하던 친구가 귀국길에 평양을 방문하는 바람에 '함께 있었고 함께 토론했다'는 죄로 안기부에 끌려간다. 모진 고문 끝에 간첩으로 조작돼 무기징역을 선고 받고 13년2개월의 감옥살이를 했다. 얼마나 억울했을까. 독방에서 때로는 난동을 부렸고 때로는 발악을 하기도 했다.

두번의 죽음을 체험하고 5년의 세월이 흐른 다음 그는 자신의 몸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자신의 몸을 붙들고 흔드는 일밖에 할 일이 없는 옥살이에서 자신의 몸이 우주임을 체득하기 시작한다. 날아다니는 파리, 거미 한마리, 운동장의 풀 한 포기가 내몸의 일부라고 느낀다. 망가진 몸을 치유하기 위해 풀들을 먹기 시작하고 관찰하면서 그는 생태주의자가 된다. 교도소장의 허락을 받아 운동장 한구석에 야초화단을 만들고 온갖 잡초들을 모으고 관찰하고 기록했다. 산부추·며느리밑씻개·수까치깨·바늘사초…. 1백여종의 야초들을 키우고 기록하고 그림을 그려 감옥밖 '미선'에게 엽서 형식으로 글을 띄우기 시작했다. 이 엽서 하나 하나를 모아 책으로 엮은 게 황대권의 『야생초 편지』다.

야생초 편지엔 분노의 흔적이 없다. 잘못된 국가권력, 폭력 앞에 그의 인생과 몸이 죄다 망가졌지만 그는 도인처럼, 이름모를 풀 한 포기에 이름을 붙이고 사랑을 주며 자연농업의 중요성과 나눔의 사회를 조용히 외치고 있을 뿐이다. 거대한 국가폭력을 야생초 사랑으로 환치한, 보통사람으로선 도달할 수 없는 도의 경지다.

"나는 '방화범'이었다. '살인'의 의도는 없었다 하더라도, 사람이 있는 곳에 불을 질러 한 학생의 생명을 잃게 하고 그 외에도 세명을 다치게 한 이른바 '방화치사상죄'를 범한 사람이다. 사람을 다치지 않기 위해 고민했다고 스스로에게 확인시키고, 나의 목적은 정당한 것이었다고 스스로를 안심시키고, 또 그로 인해 제법 긴 감옥살이를 했어도 나의 행동으로 인해 한 사람이 목숨을 잃었다는 사실은 지울 수 없는 것이었고 나는 아직 그 사실로부터 해방되지 못했다. 아니 될 수가 없었다."(문부식.'잃어버린 기억을 찾아서/광기의 시대를 생각함')

20년 전 신군부의 광주 학살에 분노한 신학도 문부식은 부산 미국문화원에 방화를 한다. 이 방화로 숨진 한 학생에 대한 속죄의 글을 쓰면서 그는 폭력에 대한 폭력 또한 용서받을 수 없는 폭력임을 고백한다. 민주화운동심의위원회가 부산 동의대사건 관련 학생들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결정했을 때, 문부식은 어떤 사건으로 누군가 죽고 깊은 상처를 입었는데 폭력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좌절한다. 폭력에 대한 폭력에 훈장을 거는 사회가 제대로 된 사회인가. 한 시대의 광기(狂氣)가 남긴 폭력의 유물을 우리는 아직도 제대로 청산하지 못하고 있다.

SBS-TV드라마 '야인시대'의 인기가 높다. 왕년의 주먹 김두한의 일대기다. 젊은 주먹 김두한이 구마적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두며 종로 깡패의 오야붕으로 등극한 뒤, 아버지 김좌진 장군의 제삿날 할머니 집을 찾는다. 할머니는 내 손자가 거리의 건달일 수 없다고 내친다. 동행한 기자가 말한다. 그는 단순한 주먹패가 아니다. 일본 사무라이 깡패와 맞서 종로상권을 보호하는 항일의 주먹임을 역설한다. 할머니는 그를 받아들인다. 이 폭력극을 항일 주먹으로 미화시켜가면서 온가족이 TV 앞에 몰려드는 이 세태를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일 대 일 주먹 승부로 오야붕 자리를 깨끗이 물러나는 주먹사회의 질서가 이 어지러운 정치풍토에 얼마나 청량제 역할을 하는가라는 견강부회도 있다.

주먹의 폭력은 가장 단순하면서도 가장 원시적인 폭력의 시작이다. 폭력의 원초적 본능을 자극하고 미화하는 우리 사회는 또 다른 형태의 광기에 접어든 것인가.

인류역사상 가장 폭력적인 수단이 핵폭탄이다. 잘못된 권력의 간첩조작극, 신군부의 학살, 일제의 폭력 지배보다 천배 만배 더 폭력적인 것이 핵위협이고 핵폭력이다. 지금 북한이 핵개발을 추진 중임을 시인함으로써 남한뿐만 아니라 세계가 경악하고 있다. '미제'의 폭력에 대결하기 위해, 압박을 풀기 위한 자구책으로 핵개발을 추진 중임을 시인했고 고농축우라늄을 30㎏ 이상 보유하고 있다는 보도가 나오고 있다. 북한이 한반도 한민족 전체를 볼모로 핵위협을 하면서 미국과 흥정을 벌일 셈이다. 폭력은 자구 아닌 자해 수단일 뿐이다. 폭력의 미화, 폭력과의 어떤 흥정도 역사에서 성공으로 기록된 적이 없다. 폭력의 제거, 핵위협의 자진 철거가 냉전시대 마지막으로 남아 있는 광기의 사회를 벗어나는 유일한 길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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