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 데이여! 영원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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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원혜영아 그동안 바보라고 해서 미안해.'

'도형아, 승묵아, 광열아 괴롭혀서 미안하다. 친하고 좋은 고참이 될게.'

'선생님 지난번에 장난 전화해서 죄송해여….'

'아프리카 추장이라고 놀린 거 진심으로 사과할게.'

'엄마, 나 이제 정신차릴게. 미안해…말 잘들을게요. 유진.'

이런 글들과 함께 오늘 당신에게 비닐에 담긴 사과가 전해진다면 놀라지 말기를. 청결하고 탐스러운 붉은 능금은 언젠가 당신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바로 그 사람이 보내온 것이니. 혹여 그 상처가 너무 크고 깊은 것일지라도 이 순간 모두 용서하길. 오늘은 '애플 데이', 둘이서(2) 사과하는(4) '사과의 날', 서로 화해하는 날이니. 우리 속담에도 있지 않은가. '비는 장수 목 못 벤다'고. 누구든 잘못을 뉘우쳐 사과하면 용서하게 되는 법이다.

지난 20일 대학로에서 펼친 '애플 데이' 선포식에 참여한 많은 이들의 화해의 사연을 담은 '안심 사과'가 오늘 그 상대방을 찾아 간다. 사과(謝過)를 사과(apple)로 풀어 잘못을 비는 쪽은 사과를 보내고 이를 받은 이는 사과를 먹음으로써 화해가 이뤄진다는 믿음과 소망을 담은 것들이다. '애플 데이'를 만든 학교폭력대책국민협의회가 즉석에서 껍질째 먹을 수 있도록 준비한 무농약 청결 사과 3천5백개가 선포식장에서 동이 났다고 하니 어림해도 연인원 7천명이 오늘 마음의 상처를 다독일 수 있을 듯하다. 휴가 나온 군인에서부터 교사·청소년·부모·연인 등 사과를 보내는 이들의 면면도 사연만큼이나 다양하다.

'애플 데이'는 학교 폭력 근절의 염원에서 탄생했다. 학교 폭력의 악순환이 마침내 교실 살인까지 부르자 가해자건 피해자건 모두 희생자며 이는 우리 사회의 책임이라는 인식 아래 청소년 단체를 주축으로 80여개 단체가 모여 협의회를 발족한 것은 지난 5월 22일. 학교폭력추방 서명운동, 학교폭력방지 특별법 제정 촉구, 학교폭력추방 음악회, 종교 지도자들을 대상으로 한 청소년 부모교육 요청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쳐오다 마침내 사과에 인색한 우리 문화를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데에 이른 것이다.

기실 감정의 골은 작은 잘못으로 파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잘못을 인정하는 데 익숙하지 않은 우리들은 때론 겸연쩍어, 때론 대수롭지 않게 여겨 그냥 지나치기 일쑤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더욱 그렇다. 반성할 시기를 놓치며 작은 잘못은 점차 더 큰 잘못으로 발전하고, 잘못을 저지른 상대방에 대한 서운함은 분노에서 원한으로 깊어진다. 호미로 막을 일을 가래로도 못 막는 일이 비일비재한 것은 잘못을 빨리 사과하지 못하는 습성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흔하다.

온갖 기념일이 난무해 가정마다 '기념일 신드롬'을 앓을 지경임에도 불구하고 '애플 데이'의 탄생이 반가운 것은 쑥스러움을 날려버리고 공공연하게 잘못에 대한 사과를 주고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바란다. '애플 데이'가 영원하기를. 이성의 사랑을 갈구하는 '밸런타인 데이'나 '화이트 데이'처럼, 화해의 전령사 '애플 데이'도 우리 사회에서 왕창 뜨기를.

2월 14일에는 초콜릿이, 3월 14일에는 사탕이 넘쳐나듯 사과가 무르익는 이 시월에 24일만은 가정·학교·직장 가리지 않고 빨간 능금이 넘쳐나기를. 그래서 인간은 누구나 잘못을 저지를 수 있으며, 그 잘못을 사과함으로써 용서받아 화해할 수 있다는 아량과 믿음을 서로 지닐 수 있기를.

'애플 데이' 선포식에 사과를 기증한 농협은 오늘 서울 명동을 비롯한 전국 각지에서 좌판을 벌이고 5만개의 사과를 무료로 나눠준다고 한다. 동터오는 이 아침, 붉은 태양을 향해 서서 잠시 눈을 감고 지난 날들을 반추해 보자. 마음 한 켠이 어두워 오는가? 그렇다면 밤이 저물기 전에 그 사람에게 사과를 전하라. 내년은 너무 늦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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