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산의 청동기시대 무덤 유적으론 음봉면 월랑리 고인돌(2기)이 있다. 그 중 한기 덮개돌은 지름 380㎝, 높이 120㎝로 큰 편이다. 주위에 이런 큰 돌이 나올만한 곳이 없는 걸 볼 때 멀리서 옮겨온 것으로 생각된다.
1976년 청동기시대 후기 석관묘가 발견된 아산 신창면 남성리 40-3 번지. 가축사료용 수수밭으로 변해 있었다. 뒤쪽 민가에서 만난 70대 노인은 30여년 전 발굴을 기억하지 못했다. [조한필 기자]
하지만 이 돌널무덤만 달랑 발견돼 이 무덤 주인공을 수장 혹은 제사장으로 한 정치집단의 존재 가능성을 가늠하기가 힘들다. 그런데 남성리의 동·서쪽으로 비슷하게 떨어진 거리에서 다른 청동기유적이 발견돼 시사하는 바 크다.
1983년 남성리에서 서쪽 약 8㎞ 떨어진 선장면 궁평리에서 청동기 일괄 유물이 출토됐다. 길이 31㎝의 세형동검 한 점과 청동제 거울·도끼·꺾창(銅戈) 등이 남성리와 비슷한 구릉지대에서 나왔다. 지하유구 성격 등 자세한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또 동쪽으로 현충사가 있는 염치읍 백암리에서 목이 긴 토기(長頸壺), 속이 깊은 토기(深鉢形土器)와 천하석 옥제품 한 세트(6개)가 발견됐다. 모두 청동기시대 유물이다.
방패를 닮은 청동제품. 사람이 팔·다리를 벌리고 있는 형상으로 윗부분에 끈을 매단 흔적의 구멍이 세 개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위에서 거론된 곳들은 모두 곡교천과 1~2㎞ 떨어진 지역이다. 큰 하천과 가까운 구릉지역에 아산의 많은 ‘청동기인’들이 거주했음을 알 수 있다.
남성리 석관묘 주인공은 누구일까? 특정 시기 이 지역에서 가장 추앙받던 인물은 아니었을까. 그리고 남성리는 반경 약 10㎞ 인근 지역을 지배하던 집단의 중심지였을 것이다. 남성리 정치세력은 아산만의 풍부한 해산물과 곡교천 변 풍부한 농산물을 토대로 이 일대를 지배했을 가능성이 있다. 세형동검 9개, 방패형·검파형 동기 등 ‘귀한 유물’이 이를 증명한다.
약 25㎞ 떨어진 예산 대흥면 동서리 집단도 출토 유물로 보건대 만만찮은 세력으로 남성리와 전략적 친분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을 것이다. 시베리아 샤먼의 대표적 표식인 사슴(남성리), 손(동서리)이 새겨진 비슷한 형태 청동기를 지녔다는 점이 이를 뒷받침한다.
조한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