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고 거창해야만 위대한 것인가
시 - 김경미 ‘흑앵’ 외 22편
김경미 시인은 “주변 사람과 관계를 맺는 데 미숙해 쩔쩔 매는 편인데도 시에서는 과감하게 속내를 드러내곤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또 “내 시에 자주 등장하는 그리움의 대상은 반드시 이성(異性)을 뜻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강정호 인턴 기자]
이런 내력 때문인지 김씨의 시는 사랑시라는 이미지가 강하다. 올해 김씨의 후보작 가운데 하나인 ‘웅크리다’만 해도 그렇다. 시의 화자는 ‘파란 물감 옅게 바다처럼 번져가는 저녁 창 앞에서’ 자신의 몸을 ‘옛날식 검은 레코드판’처럼 동그랗게 만 후 몸 안에서 흘러나오는 하나, 둘, 셋 사랑의 상처의 노래를 듣는다.
예심 위원들도 비슷하게 본다. “김씨의 시가 시상을 역전시켜 반짝반짝 하는 느낌을 주는 힘이 있지만 끝내 사랑을 두둔한다”는 평가다. 정작 김씨의 생각은 좀 다르다. 자신의 시에 자주 등장하는 그리움의 대상은 쌍둥이처럼 자신과 잘 맞은 사람일 뿐 반드시 이성일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김씨가 감상용으로 추천한 ‘흑앵(버찌)’도 얼핏 사랑시로 독해가 가능할 듯 하다. 하지만 김씨는 “작은 것이 위대한 것이고 반대로 큰 것도 별것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을 표현한 시”라고 설명했다. 또 사소한 것의 고유성을 얘기하는 시라고 말한다. 시에는 함정도 도사리고 있다. 김씨는 “노란무늬 붓꽃은 노랑 붓꽃과 다른 종류”라고 했다. 마찬가지로 천남성은 별 이름이 아니라 풀 이름이다. 미세한 말의 차이가 현격한 느낌의 차이를 부를 수 있다.
그럼에도 김씨는 “시는 똑바로 읽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 추상화처럼 즐겨야 한다”는 입장이다. 열린 감각으로 감상하라는 주문이다. 신준봉 기자
◆김경미=1959년 경기도 부천 출생. 83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쉿, 나의 세컨드는』 『고통을 달래는 순서』 등.
사진=강정호 인턴 기자
흑앵
크고 위대한 일을 해낼듯한 하루이므로
화분에 물 준 것을 오늘의 운동이라친다
저 먼 사바나 초원에서 온 비와 알래
스카를 닮은
흰 구름떼를
오늘의 관광이라 친다
뿌리 질긴 성격을 머리카락처럼 아주 조금 다듬었음을
오늘의 건축이라 친다
젖은 우산 냄새를 청춘이라고 치고
떠나왔음을
해마다 한겹씩 흑백의 필름통을 감는 나무들은 다 사진 찍어두었을 거다
신록답지 못했던 그 사진들 없애려
나뭇잎마다
한 장 한 장 치마처럼 들춰본 추억을
오늘의 범죄라 친다
없애고도 산뜻해지지 않은 이 나날의 해와 달을
오늘의 감옥이라 친다
노란무늬 붓꽃을 노랑 붓꽃이라 칠수는 없어도
천남성을 별이라 칠 수는 없어도
오래 울고난 눈을 검정버찌라 칠 수는 없어도
나뭇잎 속의 사진을 당신으로 쳐주고 싶지는 않아도
종일 사로잡힌 오늘 하루의 그리움을
위대함이라 친다
<‘시안’ 2010년 여름호 발표>
대필작가 통해 묻다, 소설의 힘
소설 - 권여선 ‘팔도기획’
권여선씨의 단편 ‘팔도 기획’은 이 시대 소설의 값어치를 묻는 진지한 내용이지만 가벼운 웃음도 넘친다. 권씨는 “예전에 사람들을 히스테릭하게, 비극적으로 그렸다면 요즘은 나이가 들어서인지 귀엽게 만드는 것 같다”고 했다. [중앙포토]
2007년 두 번째 소설집 『분홍리본의 시절』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 오죽하면 평론가 김영찬이 해설에서 ‘병리학적 인물열전’이라고 표현했을까.
사설이 길었다. 그만큼 권씨의 올해 후보작은 예전과 다르다. 권씨도 이를 인정한다. 좀 아둔한 질문을 던졌다. “작품이 얼마나 만족스러운가.” 그는 “스타일을 모험적으로 바꾸다 보니 읽는 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일지 견적이 안 나온다”고 답했다. 권씨의 걱정은 최소한 예심에서는 기우였다. “비타협적 예술가 정신을 정공법으로 환기한 작품” “현실비판에 웃음 주는 요소까지 배치했다” “후보작 중 가장 빠른 속도로 읽힌다” 등 우호적인 평가가 많았다.
소설은 자서전 등을 대신 써주는 대필사무실 ‘팔도기획’에서 벌어지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를 통해 이 시대 소설의 값어치를 묻는다. 소설은 어떤 힘이 있나, 소설가는 어때야 하는가 같은 질문을 향해 내달린다. 어느 날 사무실로 풍요보다 풍상과 사이가 가까웠을 법한 20대 여자가 찾아온다. 일감을 맡기러 온 게 아니라 대필 일거리를 찾아 온 소설가 지망생이다. 뿌듯한 비밀이라도 털어놓듯 자신은 소설을 쓴다고 밝히며 환하게 미소 짓고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는 여자는 속물 다 된 대필 작가들에게는 이질적인 존재다.
결국 사고가 터진다. 닭발로 돈 번 요식업체 사장의 자서전 대필을 맡은 여자가 의뢰인이 원한 에피소드를 극구 빼면서다. 이제는 윤 작가로 통하는 여자의 변이 거의 예술이다. “그런 상투적인 일화는 우리가 참된 본질에 가까워질 때만 느낄 수 있는 영혼의 진동을 방해”하기 때문이라는 게 이유다. “영혼의 진도오오옹?” 공동작업을 하던 정 선배, 나자빠진다. 결국 윤 작가는 퇴출된다. 그러나 그가 남긴 원고는 걸작으로 밝혀진다.
권씨는 “평소에는 멀쩡하던 사람들이 뒤집혀 폭발하면 뭐가 나오나 하는 게 늘 관심사였다”고 말했다. 하지만 요즘은 사람들을 예전처럼 사람들을 막장으로 몰지는 않는단다. “일상의 자잘한 갈등이 보다 조용한 방식으로 해결되는 양상에 관심이 있다”고 했다. 올해 권씨의 후보작은 그런 소설이다.
신준봉 기자
◆권여선=1965년 경북 안동 출생. 96년 장편소설 『푸르른 틈새』로 상상문학상 받으며 등단. 소설집 『처녀치마』 『분홍 리본의 시절』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