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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적·유물로 본 내고장 역사 ④ 아산 남성리 청동기 유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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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한필 기자

국도 21호를 따라 아산 신창면을 향해 가다 득산육교 옆으로 빠져 배미동 삼정백조아파트를 지났다. 곧 큰 길을 벗어나 시골길로 접어 들어 5분쯤 가니 아산 신창면 남성리 40-3번지가 나왔다. 얕은 구릉 위로 밭이 펼쳐져 있었다. 이곳은 남성3리로 형제방죽이라고 불린다. 여기서 중요한 청동기 유물이 많이 나온 돌널무덤(석관묘)이 발견됐다.

우리나라 청동기시대는 학계에서 대략 서기전 1000년 경부터 기원 전후 시기까지로 잡는다. 약 1000년간 지속됐다고 본다. 옛 이야기가 기록됐던 시기를 역사시대로 부르고 그 전 시기를 선사(先史)시대라고 한다. 선사시대는 주된 생활도구 재질에 따라 구석기·신석기·청동기·철기시대로 나눈다. 역사기록은 철기시대로 들어서면서 등장한다.

사슴이 그려진 남성리 출토 검파형(칼자루형)동기.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청동기는 인류가 처음 사용한 금속이다. 원시 인류가 돌을 갈아 무기·농기구로 사용하다 금속기를 만든 건 엄청난 발전이었다. 구리 성분을 함유한 광석을 찾아 거기에 다른 성분의 금속(주석·아연·납 등)을 혼합해 주형 틀에서 칼·도끼 등을 만들어 냈다.

이런 청동기가 아산 남성리(南城里)에서 많이 나왔다. 우리나라의 다른 곳에선 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의 청동 제품이 포함돼 있다. 이른바 방패형 동기(銅器)다. 창이나 화살을 막는 데 사용하는 방패(防牌)처럼 생겼다 해 붙여진 이름이다. 그러나 실제 방패처럼 크지는 않다. 길이 17.6㎝, 너비 19.5㎝로 손바닥만 하다.

그리고 검파형 동기도 출토됐다. 모양이 칼자루(劍把)와 비슷하다. 검파형 동기는 흡사한 것이 남성리와 가까운 예산군 대흥면 동서리(1978년), 또 대전 괴정동(1967년)서도 나와 충남 지역의 독특한 청동기 유물로 자리잡았다. 한국의 청동기 기원은 자체 발원설 및 중국 은나라 영향설이 있으나 시베리아 기원설이 유력하다. 남부 시베리아 예니세이강 상류의 미누신스크 지방에서 출현한 카라스크 문화(기원전 1200~700년) 담당자가 동쪽으로 이동해 한반도에 전파한 것으로 본다.

예산 동서리 출토 검파형 동기엔 손무늬가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남성리 유적=1976년 1월 과수원 창고 옆에 우물을 파는데 많은 돌무더기가 땅속에서 나왔다. 이상히 여겨 계속 파내려가니 옛 무덤이 있었던 것이다. 아산에선 처음으로 청동검 9개 등 많은 청동기들이 쏟아졌다. 국립중앙박물관이 현황 조사에 나섰다. 돌널무덤은 우물 굴착으로 이미 많이 파괴된 상태였다. 주변지역까지 넓게 조사했으나 다른 무덤이나 주거지는 추가로 발견되진 않았다.

이때 발견된 청동기 유물은 청동검, 방패형·검파형 동기 외에 거울·도끼(銅斧)·끌(銅鑿) 등이 있다. 그리고 관옥(管玉) 목걸이와 곡옥(曲玉) 한 개, 토기 조각들이 발견됐다.

석관묘는 부식된 암반을 파서 묘광을 만들어 조성됐다. 토광은 동서 방향으로 길이 3.1m, 너비 1.8m, 깊이 1m 규모. 목걸이 발견 위치로 봐 동쪽에 시신의 머리를 뒀던 것 같다. 조성시기는 유물로 보건대 기원전 300년 전후한 청동기시대 후기.

현재 무덤 자리엔 가축사료용 수수가 심어져 있다. 유적지를 알리는 아무런 표지가 없어 쉽게 찾기는 힘들다. 수수밭 바로 옆 민가 마당에서 나이 70대쯤의 농부가 쉬고 있었다. 집 주인인듯 했다. 유적에 대해 물었다. “30여 년전 이곳에서 옛 무덤이 나와 떠들썩한 적이 없었나요?” “이곳서 오래 살았지만 처음 듣는 얘기인데…” 라며 전혀 모른다는 표정이다.

이게 사실이라며 이 농부는 30년 이상 이곳에 산 것이 아니다. 거짓말을 했다면 과수원에서 유물이 나와 농사를 오랫동안 짓지 못했던 기억이 나, 또 그리 될까봐 걱정돼서다. 그렇다. 유적 발견은 해당 지주에겐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다. 유적이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도 그 곳이 국가 명소가 돼 편입되지 않는 한 땅임자로선 귀찮은 일이다.

남성리 출토 천하석제 곡옥.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방패형·검파형 동기=방패형 청동기는 사람이 두 팔과 다리를 쫙 벌리고 있는 형상이다. 위에는 구멍 세개가 뚫려 있다. 끈을 묶었던 흔적이 있다. 여기에 끈을 묶어 사람 목이나 옷에다 걸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두 팔’의 끄트머리에 방울처럼 생긴 것이 붙어 있다. 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고 속은 비었다.

앞·뒷면에 각각 고리걸이가 한개(앞면), 두개(뒷면) 달려 있다. 새끼 꼰 형태의 고리를 걸어 주조한 기술이 정교하다. 표면에는 섬세한 짧은 선, 빗금을 사용한 문양이 그려져 있다. 무늬는 정확히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으며 마름모꼴 도형도 있다. 문양은 청동기 전체 윤곽의 바깥 쪽을 따라가며 연결돼 그려져 있다. 윗 부분은 기와집 지붕을 연상케 한다.

검파형 동기는 대나무 두 마디를 쪼개 놓은 모양이다. 3개가 출토됐는데 조금씩 크기가 다르고 사슴이 조각돼 있는 게 있다. 아래 위로 고리와 걸이가 한개씩 배치돼 있다. 고리와 사다리꼴 선 문양대가 방패형 동기와 거의 동일해 같은 곳에서 만들어졌음을 알 수 있다.

사슴 몸체는 점선으로 표시했고 두개의 뿔이 길게, 꼬리는 짧게 표현돼 있다. 3개 검파형 동기의 길이는 약 25㎝, 너비는 18~19㎝다. 예산 동서리처럼 3개 1조(組)를 이룬 게 특징이다. 예산 검파형 동기엔 사슴 대신 사람 손이 새겨진 것이 있다. (오른쪽 사진 참조)

이건무 전 국립중앙박물관장은 “사슴은 시베리아 지역의 무격신앙(샤머니즘)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요소”라며 “당시 샤먼(제사장·종교 주재자)과 같은 신분을 지닌 자가 사용했던 의기(儀器)”라고 말했다. 방패형 동기는 끈으로 목에 걸어 가슴에 늘어뜨리고, 검파형 동기는 끈으로 양 팔뚝에 묶었던 게 아닌가 추정된다.

남성리 출토 관옥(대롱옥) 목걸이.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세형동검(細形銅劍)=우리나라 청동검은 그 모양에 따라 비파형동검과 세형동검으로 나눈다. 비파형은 중국 악기인 비파를 닮았기 때문에, 세형은 비파형보다 상대적으로 가늘고 날씬해 붙여진 이름이다. 최초 발생 지역을 두고 각각 만주식동검(요령식, 비파형), 한국식동검(세형)으로도 부른다. 남성리에선 온전한 세형동검 3점과 파손된 것 6점 등 총 9점의 동검이 발견됐다. 길이는 16~31㎝, 너비 2.5~3.8㎝로 다양하다.

세형동검은 칼몸이 직선화되고 아래 쪽의 날과 등대(가운데 솟아 있는 부분)에 마디가 생기도록 갈아서 어임(결입부)을 만든 게 특징이다. 후기로 갈수록 등대 폭이 넓어지고 피홈(혈구)이늘어난다. 칼몸과 손잡이가 비파형동검처럼 따로 제작되었으나 나무 손잡이는 썩어 남아있지 않다.

윤무병 전 충남대교수에 따르면 이 동검들은 서기전 300년 경에 나타나 기원 1세기까지 사용됐다고 한다. 남성리 동검은 세형동검 1, 2기에 속한 것이 섞여 있다.

남성리 출토 세형동검 9점. [국립중앙박물관 제공]

◆이외 유물들=다뉴조문경(粗文鏡)은 뉴(꼭지)가 많은 거친 무늬 거울이다. 다뉴세문경(細文鏡)보다 덜 발달된 거울로 남성리에서 2개 나왔다. 거울의 지름은 각각 18.1㎝, 19.6㎝. 표면에 톱니바퀴같은 빗금무늬가 새겨 있었다. 아름다운 옥도 나왔다. 천하석으로 만든 곡옥은 원형의 고리를 2등분한 것 같은 형태로 한 쪽에 작은 구멍을 뚫었다. 현재 시각으로 봐도 모양과 색깔이 아름답다.

여기에 끈을 묶어 관옥(管玉, 대롱옥) 목걸이 끝에 단 것으로 생각된다. 푸른 색을 띤 관옥은 길이 1~2㎝, 지름 0.4~0.6㎝ 소형으로 모두 103점을 찾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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