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첩보원 한석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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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25면

이달 초순 심야의 프라하. '천개의 탑을 가진 도시'라는 명성을 말해주듯 야간 조명으로 환하게 밝혀진 고딕식 첨탑이 프라하의 밤하늘을 수놓았다. 스메타나의 연작 교향시 '나의 조국' 2부곡으로 유명한 몰다우(블타바)강을 건너 15분 가량 달리니 프라하 도심과 정반대의 풍경이 펼쳐진다.

프라하 외곽의 홀레쇼비체. 가을이 깊어가는 여느 유럽 도시와 크게 다르지 않다. 노랗고 붉게 물든 낙엽이 포도(鋪道)를 뒤덮고, 을씨년한 바람이 허공을 가른다.

자정을 넘어 새벽으로 넘어간 시간, 1백여명의 스태프가 분주하게 움직인다. 한국어·영어·체코어가 뒤섞여 들린다. 내년 설에 개봉할 영화 '이중간첩'(감독 김현정)의 프라하 촬영장이다. 1990대 후반 최고 스타였던 한석규가 '텔미썸딩' 이후 3년만에 복귀해 화제가 됐다.

이날 중세의 고도(古都) 프라하는 이데올로기의 대결장으로 변했다. 냉전 시대, 동베를린에서 서베를린으로 가는 검문소였던 체크포인트 찰리가 홀레쇼베체에 세워진 것. 1980년 6월 북한의 대남 사업본부 최우수 요원인 임병호(한석규)가 북한측 요원의 추격을 뿌리치고 한국으로 귀순하는 모습을 찍었다. 영화의 첫 장면이다. 동·서독 검문소, 바리케이드 등 야외세트를 포함해 8분 분량을 찍는 데 총 3억5천만원이 들었다.

동원된 현지 엑스트라는 80여명. 일반 관광객, 동·서독 군인, 미군 헌병 등이다. 임병호가 동독 검문소를 통과하기 위해 줄을 서 있는 사이 그를 추격하는 북한의 검은색 승용차 두 대가 질주했고, 관광객 사이를 뚫고 나온 임병호가 자신을 막는 차량의 보닛 위로 튕겨나가 구른 뒤 바닥에 떨어졌다. 또 일본인으로 위장한 임병호가 검문소를 빠져나온 뒤 북한의 승용차를 피해 목숨을 걸고 도주했다.

'이중간첩'은 위장 남파간첩 임병호를 통해 한국 현대사의 모순을 드러낼 작정. 특히 한국 영화 처음으로 북파간첩단, 유학생 간첩조작 사건 등 남한의 예민한 문제도 건드린다. 위장 간첩을 검거한다는 식의 반공영화 틀을 뛰어넘어 이념·사랑·액션 등이 교직하는 할리우드식 첩보 영화를 지향하고 있다.

다만 현재도 엄존하고 있는 분단이란 우리의 특수 상황을 고려해 게임을 즐기는 듯한 할리우드식 스파이 대신 시대적 이념과 개인적 신념 사이에서 희생되는 '한국인'을 부각할 예정이다. 남과 북 양쪽에서 버림받은 임병호가 결국 제3국을 선택, 그와 연인으로 발전하는 북한의 지령 전달책 윤수미(고소영)와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재회하는 마지막 장면은 최근 포르투갈의 리스본에서 촬영했다.

신인 감독 김현정은 "이데올로기 대립보다 남파 간첩 임병호가 개인적 신념과 정치적 현실 사이에서 좌절하는 과정을 보여주겠다"고 말했다.

프라하=박정호 기자

jhlogo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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