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핵파문]"北, 核무기와 對美협상 빅딜 노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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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북한은 왜 핵 개발 사실을 미국 측에 털어놓았을까.

17일 워싱턴 측의 배경 설명은 지난 3일부터 5일까지 평양을 방문한 제임스 켈리 국무부 동아태 담당 차관보가 미국 측이 축적해 온 핵 관련 증거를 들이대자 강석주 외무성 제1부상이 '시인'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1993년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부터 이듬해 핵 위기까지 치달으면서도 인정하지 않던 사실을 미국 측의 추궁 때문에 자인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지난달 방한한 도널드 럼즈펠드 미 국방장관이 '북 핵 보유설'을 언급하자 북한 관영매체들은 일제히 "대북 핵 선제 공격을 기정사실화하려는 것"이라고 발뺌했다.

이 때문에 북한 측이 미국과 핵·미사일 등 대량살상무기(WMD)문제와 북·미 관계개선을 맞바꾸기 위한 대타협을 시도하기 위해 핵 개발 의혹의 베일을 벗었을 것이란 관측이 유력하게 제기된다. 이는 임성준(任晟準)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이 "북한이 핵 개발 의혹을 솔직히 시인한 것은 이 문제를 대화를 통해 해결할 용의가 있다는 점을 밝힌 것"이라고 언급한 것과 맥락이 닿는다.

94년 10월 제네바 핵 합의 이후 핵 개발을 계속해 온 점이 드러나자 아예 이를 카드로 해 대미 협상을 시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부시 행정부의 깐깐한 대북 검증 잣대에 걸려 뜻을 이루지 못하고 옷만 벗는 꼴이 됐다.

북한은 미국 측이 평양 측의 제안을 결국 거부하고 '사실대로' 외부 세계에 알릴지 모른다는 불길한 느낌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외무성 대변인이 켈리 특사의 방북 직후인 지난 7일 관영 중앙통신 기자와의 회견에서 "미국 측이 일방적으로 우리의 인권 문제 등이 해결돼야 조(북한)·미,조·일 관계와 남북 대화가 순조로울 수 있다고 한 것은 극히 압력적이고 오만한 것이었다"고 비난한 것이 이를 뒷받침한다. 다만 켈리 특사의 방북 보따리를 놓고 한·일 정부와 할 협의 결과에 막판 기대를 걸었을 수 있다.

아무튼 부시 행정부의 강경 입장에 부닥친 북한으로서는 핵 문제를 놓고 또 한번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사회와 힘겨운 싸움을 벌이게 됐다. 이로 말미암아 김정일(金正日)국방위원장이 추진해 온 일련의 개혁·개방 조치에도 제동이 걸릴 가능성이 크다. 7월 경제관리 개선 조치와 9월 신의주 특별행정구 지정, 북·일 정상회담을 통한 대일관계 개선 움직임이 핵폭풍을 만난 것이다.

특히 국제 사회의 여론 악화로 대북 지원이 끊기고 부시 행정부가 테러 문제 등으로까지 북한에 '불량 국가' 낙인 찍기를 계속한다면 평양은 그야말로 사면초가(四面楚歌)에 빠질 수 있다.

이영종 기자

yj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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