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2회.삶의질 인프라확충이시급>"지방 살면 뒤떨어진다" 80.5%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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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0면

소설가 복거일씨가 올해 초 서울로 유턴했다. 1978년 결혼 이후 24년을 대전에서 살아온 그가 고향을 떠난 것이다.

"Y대 재학 중인 딸이 교육·문화 혜택이 풍요로운 서울로 가자는 겁니다. 저도 사람 만나러, 신간 서적 구하러 자주 상경하는 게 불편했고요. 나만이라도 고향을 지키자고 다짐했었는데…."

대표적 애향론자였던 그가 요즘엔 "지방에는 미래가 없다"며 '탈(脫)지방'을 외쳐 지역 인사들로부터 변절자로 몰린다. 복씨는 그러나 "지방은 외딴 섬"이라며 "수도권에 행정·금융·교육·문화기관이 모두 몰려 있는데 지방에서 삶의 질(質)을 말한다는 것은 가식"이라고 잘라 말했다. 정부의 수도권 진입 규제에 대해서도 "버스를 이미 탄 사람들(기득권층)이 차안이 복잡하다고 그만 태우라는 식"이라고 반박한다. 왜 그럴까.

◇지방 생활 불만, 서울로 이사하고 싶어="지방에 살면 모든 면에서 뒤떨어진다. 그래서 가능하면 서울로 이사할 생각이다."

본지 여론조사팀이 이달 초 전국 성인 남녀 1천2백39명을 대상으로 전화 여론조사를 벌인 결과는 이 한마디로 집약된다. 조사 결과 10명 중 9.5명꼴로 수도권 집중화가 갈수록 심화하고 있다고 응답했다. 이들은 수도권 집중의 가장 큰 이유로 교육문제를 꼽았다.

실제로 올해 중앙일보 대학평가에서 종합순위 20위권 내에 지방 소재 대학이 7개 있지만 포항공대·KAIST와 인하대·아주대 등 수도권 소재 대학을 제외하면 실제론 몇 안되는 형편이다.

또 10명 중 8명은 지방에 있으면 뒤떨어진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같은 상황에서 10명 중 3명이 "평소에 서울로 이사할 생각을 자주 한다"고 토로한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무엇보다 교육(46.6%) 때문이고 다음으론 경제적 이유(16.8%), 생활의 편리함(15.0%), 문화적 혜택(13. 6%)을 꼽았다.

한마디로 "삶의 질을 좌우하는 모든 것이 서울에 있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이런 비교 열등감은 해가 갈수록 깊어지고 있다. 지방에 살면 뒤떨어진다는 데 공감한 국민은 지난해 4월 조사에서 70.6%였으나 올해는 80.5%로 급격히 불어났다. 이 때문에 서울로 이사할 생각이라는 응답도 지난해보다 6.4%포인트 증가했다.

정부가 아무리 경제적으로 진입장벽을 치거나 몇몇 정부 청사를 지방으로 이전한다 해도 사회·경제·문화의 종합적인 '삶의 질' 개선없이는 수도권을 향한 지방민들의 욕구를 근본적으로 제어하기 힘든 것이다.

◇자녀 위해, 병원 찾아, 쇼핑하러 서울로=전남대 교수 李모(50)씨는 최근 60평대 아파트를 40평대로 줄였다. 두 자녀의 서울 유학비를 마련하기 위해서다. 그는 "딸이 E대 3학년인데 아들이 군복무를 마치고 올해 Y대 3학년으로 복학하자 학비·생활비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고 말했다. 자녀의 서울 한달 생활비는 등록금·월세·학원비 (국가시험·자격증 등)·식비·용돈 등을 합쳐 3백50만원선. "아이 엄마가 반찬거리라도 들고 오르락내리락하다 보면 부담이 4백만원을 훌쩍 넘는다"고 한탄한다.

그의 수입원은 월급(3백50만원)에 간혹 생기는 연구비(월평균 50만원)을 포함해도 4백만원을 넘지 않는다. 자녀를 가르치는 데 쓰고 나면 남는 돈이 한 푼도 없는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집을 줄일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서울에서 산다면 월세 1백30만원과 식비 30만원, 부대비용 50만원 등 한달에 적어도 2백10만원을 절약할 수가 있었을 것"이라고 했다.

충북 청주에 사는 주부 김여옥(52)씨는 류머티스 치료를 위해 서울 H대 병원을 자주 찾는다. "3년 전부터 다리가 아파 청주시내 병·의원을 찾았으나 오히려 병이 악화됐다"며 "지난해 말 H대 병원에서 치료·처방을 받고나서는 상태가 나아져, 힘들어도 서울행을 고집한다"고 말했다.

경성대 오승환 교수는 7년 전 직장 때문에 서울에서 부산으로 집을 옮겨 손해봤다고 안타까워했다. 6년 전 서울의 32평 아파트를 1억4천만원에 팔고 부산에서 1억7천만원짜리 46평 아파트를 장만했는데, 최근 아파트 시세를 비교하니 서울 아파트는 2억8천만원, 부산은 2억2천만원이더라는 것이다. 그는 "서울 집을 팔지 않고 부산에서 전세로 살았더라면 1억원 정도를 앉아서 벌었을 것"이라며 혀를 찼다.

그는 한국 제2의 도시인 부산마저 질좋고 싼 물건이 없어 아파트 단지의 아줌마들이 서울로 단체 쇼핑을 간다고 했다. 그 역시 서울 출장을 가면 대형 할인점을 꼭 들러 옷과 갈비 등을 산다.

◇삶의 질, 문화 격차도 벌어져=문화생활의 경우 사정은 더욱 심각하다.

국립중앙도서관 신현택 관장의 최근 박사학위 논문 '지역간 문화 격차에 관한 연구'에 따르면 지난 한해 동안 인구 1만명당 공연예술 행사가 수도권에서는 8. 5건, 비수도권에선 1. 6건이 열려 5배 이상의 차이를 보였다.

미술관의 경우 전국 52개 가운데 수도권에 31개(60%)가 몰려 있다. 울산·강원·충북·전북에는 공·사립 미술관이 아예 없다. 소장 작품도 전국 1만3천2백여점 중 70%인 9천60점이 수도권에 있다.

영화관의 스크린은 수도권에 53%(4백40개)가 집중돼 있는데, 전국 91개 군지역 (인구 6백여만명)에선 아예 찾아볼 수가 없다. 강원도 인제군 상동리에서 자영업을 하는 임상수(31)씨는 "영화를 좋아하지만 인제에는 극장이 없고 춘천까지는 1시간30분이나 걸리기 때문에 비디오만 본다"고 말했다.

신관장은 "지방 주민들이 문화시설에 접근하기가 상대적으로 어렵다는 사실이 통계적으로 입증된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같이 삶의 질 인프라가 부실한 데 따른 중소도시의 인구 유출도 심각한 수준이다.

하회마을로 유명한 경북 안동시는 1974년 27만명이던 인구가 올 7월 말 현재 18만명으로 줄었다. 최근 10년간 하루에 6명꼴로 안동을 떠난 것으로 집계됐다.

안동지방자치연구소 손중열 사무국장은 "탈지방화가 가속되고 있으며, 특히 안동처럼 지역 경제구조가 농업과 소규모 자영업으로만 짜인 대부분의 지방 중소도시는 거의 해체 단계에 이르고 있다"고 말했다.

경기대 이재은(경제학)교수는 "부족한 문화 서비스에 심리적 소외감이 커지고 있다. 기본적인 생활 인프라가 전국 어디서나 거의 동등하게 서비스돼야 지방이 존립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특별취재팀

협찬 : PO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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