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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화질 TV선 "대충대충 안통해"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SBS 무협 사극 '대망'의 여주인공인 이요원은 드라마 촬영 도중 카메라 화면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보고 기겁했다. 얼굴의 점 세 개가 또렷이 화면에 잡혔기 때문이다. 이 드라마가 고화질(HD)TV용으로 제작 중인 사실을 생각지 못했던 그녀는 서둘러 화장을 고쳐야 했다.

MBC '베스트 극장'의 조연출 강대선씨. 그는 최근 MBC 홈페이지에 다음과 같은 제작 후기를 올렸다. "HD 프로그램 제작 과정에서 가장 많이 들을 수 있는 말은? 걸레 가져와, 바닥 쓸고. 유리창 한 번 더 닦아줘…."

화면속 인물의 땀구멍과 솜털까지 보여준다는 HD 프로그램. 지난해 11월 SBS가 처음으로 디지털 방송 시대를 선언한 이래, 주로 스포츠·다큐멘터리물에 집중돼 왔던 HD 프로그램 제작이 드라마 영역으로 급속히 확산되고 있다.

이에 따라 '드라마 왕국'으로 불리는 한국에서 방송 제작 시스템이 근본적으로 바뀔 수 있을지 관심을 모으고 있다.

3년의 준비 과정을 거쳐 지난 12일부터 방송을 시작한 SBS 주말극 '대망'은 국내 드라마 사상 최초로 전편(24부작)을 HD로 제작하고 있다.

또 KBS도 소설과 영상을 결합한 'HDTV 문학관'을 1백% 디지털 방식으로 찍고 있는 중이다. 올 초 HD 드라마가 두세편 제작된 적이 있지만, 규모나 제작비 등에서 단연 차별화된 작품들이다.

'대망'의 경우 편당 제작비가 무려 1억2천만원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실제 세트비와 분장·미술 비용 등을 합치면 제작비가 훨씬 늘어나리라는 게 일반적 분석이다.

김종학 PD가 "우리는 HD의 맛만 보여 준 것이다. 제대로 찍으려면 현재의 방송 광고 단가로는 어림도 없다"고 말할 정도다.

HD 프로그램 제작은 현장 스태프들에겐 고역 그 자체다. 촬영장에는 마이크 대신 청소도구를 들고 뛰어다니는 스태프들이 눈에 자주 띈다. 기존의 장신구나 세트도 무용지물.

제천에 있는 '대망' 오픈 세트에는 벽과 가옥을 실제 흙과 돌·기와로 쌓아 올려 사람이 살 수 있을 정도다.

또 사극에서 여인들의 머리에 얹는 가발(가체)로 사용한 검정 실타래도 실가닥이 다 보여 쓸 수 없다. 수염도 한 올 한 올 섬세하게 붙여야 한다. '대망' 제작진은 일본에서 개발된 HDTV용 화장품을 공수해 오기도 했다.

그럼 HD 드라마 전성시대가 곧 도래할 것인가.

전문가들은 기술의 발전이나 중국의 거대한 DVD 시장 등을 감안할 때 HD 제작은 피할 수 없는 대세지만, 안방극장에 정착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릴 것으로 보고 있다.

우선 방송사가 프로그램의 '질'을 위해 막대한 제작비를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 '적당히'가 아니라 '제대로'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여기에 무엇보다 고화질의 진가를 확인할 수 있는 HDTV 수상기의 보급이 시급하다. 현재의 TV 보급률로는 어림도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은 제작도 어중간하다. '대망'의 서득원 촬영 감독은 "화면이 잘릴 것을 고려해 촬영을 하는 등 HD의 화면 비율(16:9)을 일반 수상기 비율(4:3)에 억지로 짜 맞추고 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KBS 드라마국의 안영동 주간은 "HD 드라마 제작은 더욱 활발해지겠지만, 제작상 어려움 때문에 2005년은 돼야 제대로 된 작품들을 선보일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이상복 기자

jizh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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