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학회'역사와문학의 만남' 심포지엄]"史學도史劇도결국은 해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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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6면

김두한의 일대기를 다룬 TV드라마 '야인(野人)시대'가 최근 인기를 끌고 있는 가운데 그 내용 중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꾸며낸 이야기냐는 논란이 있다. 사실과 허구의 싸움은 역사적 소재를 다룬 예술 장르에서 흔히 반복된다. '사실의 기록'인 역사와 '허구의 기록'인 문학·예술은 영원한 평행선을 달려야만 하는 운명일까.

'역사와 문학의 만남'이란 흥미로운 주제를 내건 학술 심포지엄이 문화사학회(회장 조한욱 한국교원대 교수) 주최로 최근 이화여대 인문관에서 열렸다.

역사 전공자와 문학 전공자들이 만나 일합을 겨룬 가운데 뜻밖에도 양측은 역사와 문학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그리 먼 것이 아니라는데 공감했다. 정치·경제·사회사 등 거대 담론을 중심으로 연구해온 한국 서양사학계에서 문화사·미시사(微視史) 연구의 흐름을 주도해 온 주명철(한국교원대)·곽차섭(부산대)·김기봉(경기대)교수 등이 역사학 분야 발제자로 나섰다.

이 자리에선 특히 역사논문이건 역사소설이건 간에 독자 입장에서 볼 땐 그 내용에 담긴 정보와 해석이 어떤 의미를 띄고 있느냐가 중요하다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역사와 문학 사이엔 글쓰기 방식의 차이가 있을 뿐이라는 대담한 문제 제기다.

조한욱 교수는 "역사학은 원래 문학의 한 분야로 시작되었지만 과학의 담론이 지배한 19세기 이래 역사학의 문학성이 위축되었다"면서 "과학성·실증성만 강조된 결과 역사학자들만의 역사학이 되버렸다"고 지적했다. 조교수는 또 "이젠 역사 전공자들이 나서 역사학이 갖는 문학성을 다시 찾아야 할 시점"이라며 "역사의 대중화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대중의 역사화'를 지향하며 그것은 곧 왜곡되지 않은 역사의 진실을 원래의 주인에게 되돌려주는 출발점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소설가 김탁환(건양대)교수는 역사학자 뺨치게 실증을 강조해 눈길을 끌었다. 지난 몇년 간『불멸』(미래지성),『허균, 최후의 19일』(푸른숲),『압록강』(열음사), 『나, 황진이』(푸른역사)등의 역사소설을 잇따라 펴낸 김교수는 "실증을 소홀히 한 것이 우리 역사소설의 병폐였다"면서 "역사와 문학의 만남이 역사적 사실의 객관성을 훼손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고 말했다.

문학평론가 공임순(서강대)박사는 춘원 이광수의 역사소설 『이순신』을 예로 들면서 역사소설이 탄생하는 그 시대의 배경을 지적해 주목을 받았다. "일제 강점기에 이광수가 이순신을 순결한 선인(善人)의 대표로 강조하면 할수록 조선 5백년의 타락과 부패가 역으로 부각된다"고 말하고 "특정 인물을 영웅화 하는 도덕적 순결주의가 결과적으로 한반도 식민화의 새로운 주체를 형성해 가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강조했다.

역사와 문학의 경계가 허물어지면 각자의 고유한 영역이 깨질 수도 있는데 이들이 만남을 모색하는 배경에는 '사실(事實)'이라는 개념 자체에 대한 심각한 문제 제기가 담겨있다. 그리고 사료의 행간을 읽고 말하기 위해선 문학적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요청도 들어 있다. 역사적 '사실'이 반드시 역사적 '진실'은 아니라고 이들은 말한다. 물론 실증된 사료(史料)의 객관성조차 부인하는 것은 아니다.

곽차섭 교수는 "여러 사료의 조각들을 모아 이론 덩어리로 만드는 데에는 반드시 해석이 들어간다"면서 "특정의 한 해석이 유일한 진리로 자리잡아 다양한 해석의 가능성을 차단하는 데는 정치적·문화적 권력이 작용한다"고 말했다. 결국 이는 역사가이든 역사 소설가든 사료의 객관성 위에서 다양한 해석이 있을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자신의 해석이 시대적 요구에 얼마나 부합하는지를 따져보는 지식인의 책임을 자각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지적으로 보인다.

배영대 기자 balan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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