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티오피아 참전 용사 8년째 도와 신광철 참전용사후원회 사무국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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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15일 오후 검은 얼굴을 한 백발의 '잊혀진 용사'들이 한국을 찾는다. 에티오피아의 한국전쟁 참전 장병 20명이 국가보훈처의 초청을 받아 '한국전 참전 50주년 행사'(2000∼2003년)에 참석하기 위해 오는 것이다.

"당시 에티오피아에서 온 6천여명의 자원병들은 최전방인 강원도에서 1백21명이 사망하고, 5백36명이 부상할 정도로 격전을 벌였습니다."

신광철(申光澈·50) 에티오피아 참전용사후원회 사무국장의 말이다.

단 한 사람도 포로나 투항자가 없을 정도로 용감하게 싸웠던 이 '검은 혈맹(血盟)'은 오랫동안 우리에게 잊혀졌다.

1974년 에티오피아가 공산화되면서 참전용사들은 남한을 도왔다는 이유로 일자리를 잃는 등 핍박을 받았다. 91년 민주 정부가 들어서면서 복권됐지만 오랜 내전과 가뭄으로 피폐해진 나라 경제 속에서 참전용사들의 삶도 고단할 수밖에 없었다.

"95년 우연히 이들의 사정을 접하고 무조건 도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침 제가 살고 있는 춘천에 에티오피아 참전용사 기념비도 있었고요."

申사무국장이 속해 있던 춘천 로타리클럽을 중심으로 돕겠다는 사람들이 모였다.

"96년 에티오피아 참전 용사들이 모여 사는 '코리안 샤페르'(한국 마을)를 방문했어요.'왜 이제 왔느냐''정말 반갑다'는 이들을 보고 계속 돕겠다는 결심을 굳혔습니다."

申사무국장은 이후 에티오피아를 열네번이나 방문했다. 6백여명에 달하던 후원회원이 외환위기 이후 1백명으로 줄어들고, 본업인 무역업을 해나가는 것만으로도 벅찼지만 그는 도움의 손길을 놓지 않았다. 경제적인 이유로 올 4월 에티오피아가 한국에서 대사관을 철수한 뒤 후원회(02-363-0028)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졌다.

"참전 50주년인 2000년까지만 일을 하려고 했는데 계속 도울 일이 생겨서 쉽게 그만둘 수가 없네요."

요즘엔 곧 방한할 아얄루(70) 예비역 대령에 대한 걱정으로 머리가 가득하다. 만성신부전증 환자인 그가 보훈병원에서 치료받게 됐지만, 통원하면서 기거할 곳과 간호해줄 사람이 마땅치 않아서다.

"지난번 방문 때는 수도 아디스아바바 시내에 설치된 월드컵 중계 대형 스크린 앞에서 목이 터져라 한국을 응원하던 에티오피아 국민들을 봤습니다. 한국이 이탈리아를 이기던 날 눈물을 흘리며 기뻐하던 그들에게 보답하고 싶습니다."

申사무국장이 고이 간직한 사진 한 장을 꺼냈다.

서툰 글씨로 '한국촌'이라고 쓴 한글 현판과 태극기가 걸려 있는 마을에서 빛바랜 군복을 입고 무공훈장을 가슴에 붙인 이국(異國)의 노병들이 환하게 웃고 있었다.

구희령 기자

idin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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