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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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인간은 동물과 달라 말을 할 뿐 아니라 문자를 활용해 문명을 일궈내고 문화를 계승 발전시켜 왔다. 그런데 남미의 잉카 사람들은 세련되고 표현력이 풍부한 말을 하고 살았지만 말과 생각을 담을 수 있는 문자가 없어 보편적인 지식이 사회 전반에 잘 전파될 수 없었으며 그 결과 외부인의 침략에 이들은 허무하게 망할 수밖에 없었다고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인류에게 이렇게 값진 문자는 동·서양 여러 곳에서 긴 역사와 함께 진화 발전돼 왔다고 알려져 있다. 예를 들면 오늘날 서양에서 널리 사용되고 있는 알파벳의 기원은 기원 전 2500여년쯤 메소포타미아 지역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지만 일반적으로 기원 전 850여년 전 그리스 알파벳에서 찾는다고 한다. 어쨌든 분명한 것은 현존하는 세계의 유수한 문자들은 모두가 오랜 역사적 진화의 산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유일하게 우리 한글은 창제자와 창제·발표된 날짜까지 갖고 있는 오래 된 문자인 것이다. 이 얼마나 놀랍고 자랑스러우며 다행스런 일인가.

필자는 이 분야의 문외한(門外漢)이라 한글의 우수성에 대해 논할 자격이 없다. 그러나 사계의 세계적 전문가들도 한글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다.

우리는 우리말이 있고 우리의 독특한 의식주(보신탕까지 포함해)를 위시한 고유한 전통과 문화가 있다고 자랑한다. 그러나 한글 이상으로 한국적이고 우리의 정체성을 잘 말해주며 우리 민족의 창의력을 돋보이게 하는 문화적 유산이 있겠는가. 한글이야말로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고 온 세계에 널리 자랑할 수 있는 무엇보다 중요한 문화적 유산이다.

만약 우리에게 한글이 없었다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어떠할까. 아마 어느 외국 글자를 빌려쓰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거리에 나가면 우선 눈에 보이는 거리 표지판이나 간판은 일본 글자 아니면 서양의 알파벳, 혹은 한자(漢字)만으로 씌어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의 정체성은 우리 사회의 외양에서부터 그만큼 희석돼 있을 것 아닌가.

이렇게 귀중한 한글을 창제해 주신 세종대왕의 높은 뜻과 큰 업적을 기리고 한글의 귀중함을 우리 스스로 잊지 않을 뿐 아니라 온 세계에 널리 알릴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그러한 방안의 일환으로 한글날을 국경일로 정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본다. 당초 국경일이었던 한글날을, 일년에 세배를 두 번 하게 만든 구정 연휴 등 공휴일을 늘린 정부가 1991년에 '노는 날'을 줄인다는 명분으로 국경일에서 제외시켰고 그 이후 한글날은 국민의 무관심 속에서 지나쳐 버리게 된 것이다. 물론 며칠 전의 한글날도 마찬가지였다. 정부가 나서 주5일 근무제를 강제로 실시하겠다는 판에 '노는 날'을 하루 더 만들자는 것이 아니다. 다른 노는 날을 줄여서라도 한글날만은 한글에 관한 각종 행사와 함께 온 국민이 뜻있는 하루를 보낼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세계화의 큰 물결 속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러한 시대적 여건 하에서 우리의 국가 경쟁력을 길러나가기 위해서도 무조건 우리 것만을 고집하는 배타적 사고에 사로잡혀 있어서는 물론 안된다. 사실상 세계 공용어가 돼버린 영어의 조기 교육도 해야 하고, 한자 교육의 체계적 강화도 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일들도 어디까지나 우리의 정체성과 자주성의 바탕 위에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은 두말 할 필요조차 없다. 이러한 차원에서도 먼저 한글의 위상을 바로 세우고 국어 교육을 올바르게 하는 일은 중요한 것이다.

이와 아울러 한글도 시대적 여건 변화에 맞게 꾸준히 개선·발전시켜 나가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영어의 B와 V, F와 P, L과 R, S와 TH 발음 등을 구별할 수 있도록 기존의 24글자에 어떤 표기를 하거나 현재 쓰지 않고 있는 4글자를 재활용하는 등의 방안도 가능한 것은 아닌지 연구해 볼 일이다. 중국이 현재 쓰고 있는 간자(簡字) 도입을 위해 장기간에 걸쳐 체계적인 노력을 한 것은 참고할 만한 일이라고 본다.

세계경제연구원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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