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10년간 푹 빠진 라틴 '익사'하고 싶은 매력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7면

살아보고 돌아본 남미 국가만 8개국. 그곳에 반도네온(남미 식 아코디언)의 낭만과 이과수 폭포의 웅장함만 있었으랴. 대낮 대로에서도 등장하는 무장 강도, 정부군보다 최첨단 무기를 갖췄다는 게릴라 집단. 얘기만 들어도 섬뜩하다. 우리와는 전혀 다른 세상의 이야기이지만 과연 흥미롭기도 하다. 수필집 『세상을 수청드는 여자』(김영사,1998년)로 친숙한 이강원(55·사진)씨의 리포트가 그렇다.

그는 외교관 남편을 따라 브라질·콜롬비아·아르헨티나 등 외국 생활만 25년을 했다. 그중 남미 생활이 10년. 한 법사가 이씨에게 "전생의 한 사이클이 인디오"라고 했다는데, 그럴 법도 하다 싶다. 그러나 『세상을…』에 나오듯 수백, 수천명의 손님을 척척 대접하는 능력있는 외교관 부인 역할만이 이씨의 모습이 아니다.

아르헨티나에서 한국인 최초로 스페인어 시집(『민들레 마을』)을 펴내 아시아인으로는 처음으로 '아르헨티나 작가 협회'의 정회원으로 활동했고, 남미의 문호들과도 우정을 나눴다. 콜롬비아와 아르헨티나에서는 문화 훈장도 받았다. 이번 수필집은 남미에서 만난 사람들 이야기다. 이전 책이 외교관 부인의 이면을 다룬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남미의 문화와 사회, 자연을 풀어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검은 가루(커피)와 흰 가루(마약)를 생산해내는 콜롬비아에서 최대 게릴라 집단과 정부의 평화 회담 자리에 참석했던 얘기도 나온다. 게릴라가 된 꼬마벌(소년병)과 여자 게릴라도 그곳에서 만났다. 살기 위해 남을 죽이는 무자비함 속에서도 그들 눈에는 따뜻한 눈물 한줄기가 흘렀다. "일주일을 살면 장편소설 한편, 한달을 살면 단편소설 한편, 1년을 살면 아무 것도 쓸 수 없다"던 콜롬비아의 모습이 드러나는 순간이었다고 저자는 술회한다.

남미의 복잡미묘함은 또다른 곳에서도 느껴진다. 터줏대감 인디오 문명 위에 중동 피와 로마 피가 섞인 스페인 문명이 덧칠되고 아프리카와 아시아 맛까지 가미된 '비빔밥 문화'가 그렇다. 이런 다양하고 이질적 요소들 때문에 폭력과 쿠데타·마약이 횡행하는 것 아니겠느냐며 이씨는 나름의 진단을 내린다. 그러면서 한민족 못잖은 '한'을 지니고 사는 남미인들의 문화에 빠져 보라고 저자는 권한다. 남미 작가의 작품을 읽고 나면 박생광의 '무녀도' 그림을 보고난 듯한 느낌이 든다고 한다.

절대고독이라는 말이 가슴에 내려앉는 지구 끝마을 우수아이아·아나콘다·피라냐보다도 사람이 가장 위험하다는 아마존 등 남미의 자연에 대한 찬사도 그는 빼놓지 않고 있다. 한국으로 돌아온지 한달여. "안 아픈 손가락 없듯 8개국 모두 잊을 수 없다"는 이씨는 "중남미 문학을 한국에 소개하고, 한국 작품을 그들에게 알려주는 역할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 타고르·스트라빈스키·유진 오닐 등도 영감을 얻으려고 아르헨티나를 다녀갔다. 오늘도 이어지는 '라틴 마니아' 예술가들 발길 속에 10년간 그 특혜를 받은 이씨는 한국 문화에도 '남미'라는 자양분을 건네주고 싶다고 밝혔다.

홍수현 기자

shinna@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