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우리에게는 이런 책과 필자가 없나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책과 관련한 간단한 계산을 해보자. 정가 1만원의 교양 도서가 3천권 발행됐다. 저자는 정가의 10%를 인세로 받기로 출판사와 계약한 터였다. 출간과 동시에 저자는 초판 인세 금액 3백만원을 받았다. 책을 집필하는 데는 4개월이 걸렸다. 그 기간에 다른 경제활동은 하지 않았다. 한 달 평균 75만원의 수입을 올린 셈이다. 지난 8월 통계청은 우리나라 도시 근로자 가구 월 평균 소득이 2백71만4천원이라고 발표했다.

교양 도서 초판 발행 부수는 3천권 이하인 경우가 많다. 재판이 나오리라는 보장이 없는 것은 물론 나온다 해도 매진까지 부지하세월인 경우가 많다. 집필 기간이 4개월이라면 충분한 시간이라고 보기 힘들다. 제대로 하자면 집필을 위한 자료 구입비나 취재 비용도 만만치 않다. 양질의 번역 교양 도서를 접하면서 높아진 독자들의 눈높이는 인정사정이 없다. 늘 촉박하기만 한 시간, 늘 부족하기만 한 주머니 사정, 늘 무섭기만 한 독자의 눈길. 저술가를 꿈꾸는 사람들은 그렇게 촉박하고 부족하고 무서운 현실에 가위 눌린다.

시장성이 이미 검증된 저술가, 그 이름이 브랜드 가치를 지니는 인기 저술가들도 극소수나마 있다. 하지만 그런 저술가들도 결코 안심할 수 없다.

뜨고 나면 짧은 기간 집중적으로 여러 광고에 모델로 출연해 큰 수입을 올리는 연예인들이 있다. '한철 메뚜기' 신세를 자청하는 셈이다. 저술 분야에서도 어느 정도 마찬가지다. 크게 뜨고 난 뒤 비슷한 레퍼토리를 반복하다가 생산력 고갈을 스스로 재촉하는 꼴이 되기 쉽다. 저술가 개인의 판단도 문제겠지만 저술 역량의 재충전과 지적인 온축의 시간을 좀처럼 허락하지 않는 구조도 문제다.

물론 일정 수준 이상의 교양 도서를 집필할 수 있는 전문 저술가가 드문 현실의 원인이 반드시 돈과 시간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요컨대 그것이 충분조건은 아니다. 도서 시장의 규모와 독서 수요의 편향성도 문제다. 전문적인 주제를 평이하면서도 격조 있는 글로 풀어내 전달하는 능력을 기를 수 있는 기회가 없다는 점도 원인이다.

이 문제는 우리나라의 글쓰기 교육 문제와 연결된다. 하지만 별도의 긴 논의가 필요하기에 이쯤에서 멈추고 두 가지 사례를 살펴보기로 한다.

일본 고대사 연구자 히라노 구니오(平野邦雄)는 다케우치 리조·야마다 히데오 등과 함께 『일본고대인명사전』을 편찬한 것으로 유명하다. 1958년에 제1권을 출간한 이후 77년에 제7권이 나와 마무리된 방대한 사전이다. 히라노 구니오는 대학원생 시절 요시카와고분칸(吉川弘文館) 측에 고대인명사전의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연구비를 신청했다. 사실상 저술 지원금을 신청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로부터 20여 년이 흐르는 동안 출판사 측은 한 번도 원고를 독촉하지 않았다. 출판사 측이 명실상부하게 물심양면으로 저자를 뒷받침하면서 기다려 준 경우다.

명나라 환관 정화의 대항해 이야기를 담은 『중국이 바다를 지배했을 때』 (When China Ruled the Seas)의 저자 루이스 리바시스는, 집필을 위해 중국 난징(南京)대에서 연구와 자료 수집에 몰두한 것은 물론 정화의 후손들을 찾아 인터뷰했고, 정화의 항해로를 따라 세계 각지를 직접 답사했다. 본격적으로 집필에 착수하기까지 2년 이상의 준비 기간을 보냈다. 그 결과 나온 위의 책은 중국의 잊혀진 대양 항해 전통을 서양 독자들에게 널리 알렸다. 그리고 중국을 대외 개방적인 해양 국가로 다시 보게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히라노 구니오는 학자이고 루이스 리바시스는 내셔널지오그래픽·뉴욕타임스 등에 많은 글을 기고한 프리랜서 작가다. 학문 활동으로서의 저술이든 일반 독자 대상의 저술이든 충실한 저작물이 나오기 위한 기본적인 조건이 시간과 돈이라는 것을 말해주는 사례들이다. 수준 높은 번역서를 예로 들면서 '왜 우리에게는 이런 필자, 이런 책이 없는가?'라고 묻는 사람을 만날 때가 있다. 나는 이렇게 답하곤 한다. '저술은 헝그리 정신과 골방의 상상력만으로 될 일이 아니다'. 부족하나마 이 글이 그런 질문에 대한 대답이 됐으면 좋겠다.

출판칼럼리스트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