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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 韓食堂서 열받는 이유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미국 가정의 거실이나 서재에서, 종이로 만든 꼬마 우산(紙雨傘)을 본 경험이 여러 차례 있다. 아이스크림 위에 꽂혀 있거나 칵테일 잔 위에 꽂혀 있는 일본식 지우산이다. 나무 젓가락이 단정한 종이 케이스에 든 채 눈에 띄기 좋은 곳에 놓여 있는 것도 여러 번 보았다. 일본 음식점에서 집어온, 붓질이 단순한 우키요에(浮世繪) 풍 그림이 그려진 냅킨을 자랑스럽게 보관하고 있는 집도 있었다.

남을 접대했든 접대를 받았든 일본 음식점에 다녀왔다는 증거다. 미국에 있는 여러 나라 음식점 중 음식 값이 가장 비싼 곳은 일본 음식점이다. 그래서 그럴 것이다. 미국인들에게 일본 음식점 다녀온 것은 은근한 자랑거리다. 일본 음식점 웨이터들은 눈치가 빠르고 민첩한 것으로 소문나 있다. 담배 물고 라이터 찾느라고 주머니를 뒤적거리고 있으면 웨이터가 성냥을 들고 총알같이 달려오는 데가 일본 음식점이다. 앞에 놓인 식수 잔이 비어 있을 새가 없다.

9월 말, 로마의 초저녁은 쌀쌀했다. 꾸러미 여행이라서 일행이 여럿이었다. 안내자를 따라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의 한 한국 식당으로 갔다. 예약이 돼 있었을 터인데도 빈 자리가 없다고 해서 밖에서 기다렸다. 떨면서 기다렸다. 로마 밤거리의 개떼가 된 기분이었다. 로마에는 그런 개떼가 흔하다. 해외 근로자들인 듯한 한 무리 한국인들이 몰려 나온 다음에야 우리 일행은 음식점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종업원들은 식탁에다 접시를 가만히 내려놓는 것이 아니었다. "탕탕" 소리가 났다. 한 줌 쥐어다 식탁에다 던져놓은 수저는 우리가 일일이 나누어야 했다. 접시에 담겨 나온 음식을 나는 '한식'이라고 불러줄 수 없다.

이탈리아에 오래 살았다는 여주인에게 한국인 꾸러미 여행자들은 정성스레 접대해야 하는 고객이 아니었다. 우르르 몰려다니는, 그러나 다시 올 가능성이 매우 희박한 떨거지들에 가깝지 않았을까 싶다. 마구 골이 났다. 함께 골을 내어주었으면 하고 이 아침에 나는 이 글을 쓴다. 내가 즐겨 마시는 술이 그 음식점에는 없었다. 안주인에게 내가 가지고 다니는 술을 마실 수 없느냐고 정중하게 물어 보았다. "원칙적으로는 안 되지만…"하고 말끝을 흐렸다. 손님을 밖에서 기다리게 하는 원칙도 있느냐고 물었더니 미간이 어두워졌다. 나는 그 음식점의 음식을 끝내 먹어내지 못한 채 원칙을 어기고 가지고 다니던 술만 마시고 나왔다.

머리카락이 희끗희끗해서 그럴 것이다. 외국의 음식점에 들어가면 나는 '서(선생님)', 내 아내는 '레이디(사모님)'가 된다. 고급 음식점에서만 그런 것이 아니고 대개의 음식점에서 다 그렇다. 그런 데서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으면서 주린 배를 채우는 것은 고된 취재 여행의 피곤을 잊게 하는 큰 기쁨이다. 그런데 유독 꾸러미에 섞여 해외의 한국 음식점에만 가면 열을 받고 나온다. 같은 한국인이라서 임의로워서 그런가? 한두 번 한 경험이 아니다.

로마 뿐만 아니다. 아테네·베이징·울란바토르의 한국 음식점, 내게는 모두 악몽이었다. 해외의 한국 음식점들은 얼큰한 김치찌개에 대한 한국인의 줄기찬 그리움을 잘 이용한다. 그뿐이다. 안 가면 그만이지만 꾸러미 여행일 경우 개개인에게는 선택권이 없다. 나는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해외 음식점 조명시설의 조도(照度)가 가장 낮은 곳 중의 하나가 한국 음식점일 것이다. 화장실이 가장 깨끗하지 못한 곳 중의 하나가 한국 음식점 화장실일 것이다. 나는 현지인들이 우리 한국인이 모두 '가화만사성' 현판이 걸린 어둑어둑하고 너저분한 식당에서 그렇게 형편 없는 음식을 먹으면서 사는 줄 알까봐 그게 두렵다. 여행사 직원들, 현지의 한국인 관리들도 나처럼 좀 두려워 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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