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년 OECD 가입 들떠 개방 대비 소홀 위기 불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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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4면

"한국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29번째 회원국으로 받아들인다."

1996년 10월 11일 프랑스 파리 OECD 본부.28개 회원국이 이사회를 열어 한국의 OECD 회원 가입을 만장일치로 의결했다. 48년 OECD 창립 당시만 해도 세계 최빈국 중 하나였던 한국이 마침내 '부자 클럽'에 입성하는 감격스런 순간이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의 가입 시기와 자격을 둘러싸고 OECD 회원국과 국내에선 논란이 일었다. 아직 대외개방에 견딜 만한 경쟁력을 갖추지 못했다는 점이 집중 거론됐다.

OECD 회원국이 되면 최대한 시장을 개방하고 규제도 대폭 풀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 시장은 폐쇄적이고 규제가 많았다.

무엇보다 영세하고 낙후된 금융산업이 문제였으며, 환경·노동·고용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자격 시비가 일었다. 독일과 벨기에 등은 노동정책을 문제삼아 공개적으로 반대 의사를 밝혔다. 이런 분위기에 따라 외국 언론들도 "한국의 OECD 가입 가능성은 50%"라며 부정적인 분석을 내놓았다.

국내에서도 반대 의견이 많았다. OECD 가입은 시장개방과 기업의 자유로운 활동보장을 국내외에 천명하는 것인 만큼 철저한 대비가 필요했다. 섣불리 가입했다가는 멕시코식 파탄을 자초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 앞서 94년 4월 OECD의 25번째 회원국인 된 멕시코는 페소화 고평가 정책을 펴다 가입 1년 만에 페소화 폭락 사태로 경제가 혼란에 빠졌다. 가입 반대론자들은 이같은 멕시코식 파탄을 우려했다.

이같은 논란을 무릅쓰고 부자 클럽에 들어간 한국은 가입 이후가 더 문제였다. 정부는 물론 온 나라가 대외개방의 파고에 대비하는 것보다 OECD 회원국이라는 외화내빈(外華內貧)의 즐거움을 만끽하는 데 급급했다.

OECD 가입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고 94년부터 세계화를 외치며 선봉에 선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가입이 확정된 이튿날 전국여성대회에서 "OECD 가입은 우리 국민들에게 용기와 자부심을 주는 일"이라고 평가했다. 하지만 1년 뒤 국민들을 기다린 것은 고통과 절망이었다.

멕시코식 파탄이라는 우려가 현실로 나타나 한국은 외환위기에 직면했다.

금 모으기 등 국민의 희생을 바탕으로 위기는 극복했지만 고평가된 원화가치가 낮아지면서 1인당 국민소득은 다시 1만달러 아래로 떨어졌다. 한국은 OECD 회원국이란 위신을 세워볼 겨를도 없이 혹독한 부자클럽 가입 신고식을 한 것이다.

김동호 경제연구소 기자

e-news@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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