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楊斌 구금의 미스터리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양빈(楊斌)이 어떤 사람인가. 그는 북한의 달걀 노른자위 같은 시장경제 실험실 책임자다. 신의주 경제특구에 쏟는 북한의 정성을 보면 그의 실패와 성공은 북한이 어렵사리 시작한 개혁·개방의 실패와 성공, 그것을 좌우할 정도다. 김정일(金正日)위원장이 그를 양아들같이 애지중지한다는 말도 헛소문 같지는 않다.

어느날 갑자기 혜성처럼 등장한 그 양빈이 어느날 갑자기 중국 당국에 연행, 구금되는 신세가 된 것도 그의 등장 못지 않게 놀랍고 극적이다. 양빈 구금은 북한·중국관계의 미스터리요 아이러니다.

아마도 신의주 구상은 상하이(上海)에서 촉발됐을 것이다. 金위원장은 지난해 1월 상하이를 방문해 푸둥(浦東)을 중심으로 성장하는 중국의 시장경제와 정보통신(IT)산업의 현장을 보고 천지개벽이라고 외쳤다.

사회주의의 바다 위에 번영하는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섬을 만들자는 것이 신의주 구상이다. 모델은 홍콩이다. 신의주가 金위원장과 양빈의 구상대로 개발되면 신의주 건너편의 중국 도시 단둥(丹東)도 경제적으로 큰 이득을 본다. 단둥이 당분간은 신의주로 들어가는 제일의 관문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중국의 상하이에서 아이디어를 얻고, 중국의 홍콩을 모델로 하고, 중국의 단둥에 연결되고, 화교 실업가가 책임을 맡은 신의주 경제특구가 중국 정부에 의한 양빈 구금으로 시작단계에서 미래를 예측할수 없을 만큼 흔들리고 있는 것은 아이러니인 동시에 불행이다.

중국은 북한에 양빈 구금은 신의주는 물론이고 북한·중국관계와 아무 관계가 없다고 해명했다. 양빈의 어우야(歐亞)그룹의 탈세혐의를 조사하기 위해서라는 설명이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래 전부터 탈세혐의를 받아왔을 양빈을 하필 지금 구금하는 중국의 의도는 석연치 않다. 양빈은 신의주 구상의 가장 중요한 시기에 행동의 자유를 잃고 있다.

신의주 구상이 먼저 다듬어지고 거기에 맞는 인물로 양빈이 스카우트 됐다면 행정장관은 새로운 사람으로 대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짐작하는대로 신의주 구상의 대부분의 내용이 양빈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고 그 구상의 실현이 양빈같이 다소 저돌적인 추진력과 거친 상상력을 가진 사람을 필요로 하는 것이라면 양빈의 몰락은 신의주 구상에 치명타가 될 수도 있다.

신의주 구상은 확실히 거칠고 엉성하다. 북한의 대외 신인도를 생각할 때 얼마나 많은 외국기업들이 신의주에 들어갈 것이며 그 많은 자본을 어떻게 조달할 것인지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는다. 그러나 북한이 올 하반기 들어서 적극적으로 추진하는 남북한,북·일,북·미관계 개선의 노력과 병행해서 생각하면 신의주 구상이 반드시 사상누각(砂上樓閣)이라고 할 수는 없다.

그런데 남북대화가 오랜만에 진전을 보고, 북·일관계 정상화의 길이 보이고, 미국의 부시 정부가 일단 북한과 대화를 재개한 중요한 시기에 앞으로 북한 개혁·개방의 상징이 될 신의주 구상의 책임자가 구금돼 북한의 야심적인 개혁의 구상에 대한 외부세계의 신뢰를 훼손할 사태가 벌어진 것이다.

북한·중국관계는 1990년대 중반 극도로 긴장된 시기를 거쳐 지난 몇년 사이에 겨우 상당수준 회복했다. 金위원장이 95년 6월 19일 노동신문에 담화를 싣고 사회주의 혁명의 배신자들이 사회주의 사상을 왜곡하고 자본주의의 길을 걷는다고 원색적인 비난을 퍼부었을 때 두나라의 긴장관계는 절정에 달했다. 金위원장의 중국 비판은 사회주의체제 붕괴 이후 92년 한·중수교, 94년 김일성(金日成)주석 사망에서 오는 체제불안을 반영했다.

북한이 진정으로 사회주의경제에 시장경제의 요소를 도입하는 개혁을 구상한다면 이름이야 뭐라고 하든 북한 경제는 중국의 사회주의 시장경제를 북한의 사정에 맞게 변형한 북한식 사회주의 시장경제가 될 것이다. 96년 이후 북한이 많은 경제개혁 시찰단을 중국에 보낸 것도 그런 이유에서다.

북한의 변화를 바라는 사람들은 신의주 혁명에 기대를 건다. 북한이 중국에서 큰 사업을 벌이고 있는 중국계 사업가를 신의주특구 행정장관으로 임명하면서 중국 정부의 자문을 구하지 않은 것은 실수다. 중국은 북한과 러시아가 밀착되는 최근의 사태에 민감하다. 그래도 양빈 구금이 곧 신의주 구상의 좌절이 아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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