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혼합 1인1적제'가족가치 훼손 안 되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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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대법원은 호적제도를 대신할 새로운 신분등록제로 '혼합형 1인1적 편제방안'을 내놓았다. 개인별로 한 개의 신분등록부를 만들고 여기에 본인과 배우자, 부모, 자녀의 가족 신상정보를 함께 기재하는 일종의 가족부 형태다. 호주 중심 체제에서 개인 중심 체제로의 전환이다.

호주를 중심으로 가족 구성원들을 나열한 호적은 가정에서 남성이 우월한 존재임을 상징하는 기록이었다. 나이 든 어머니가 호주인 어린 아들의 보호를 받는 신분임을 드러냈으며, 호주인 남편은 아내의 동의 없이 혼외자식을 얼마든지 입적시켜왔다. 결혼과 함께 여성은 종래의 호적에서 사라지고, 남편 호적으로 옮기며 본적까지 고쳐야 했다. 더욱이 이혼.재혼 가정의 개인사가 낱낱이 기록돼 가족 구성원들이 크게 상처를 입었다.

호적의 대안은 이런 현실적 모순들을 바로잡을 수 있어야 한다. 새 신분등록제가 무엇보다 인간의 존엄을 최우선적 가치로 삼아야 하는 이유다. 이번 대법원의 시안은 양성평등이라는 시대정신에 비교적 충실하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개인의 사생활 보호 측면에서도 진일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는 이 안이 여성계 일각에서 주장했던 서구식의 완전한 개인등록제가 아니라 가족부 개념을 도입하고 있다는 점에서 호적이 없어지는 것에 대한 문화적 충격을 최소화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다만 아쉬운 것은 형제.자매를 포함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 문화는 가족을 근간으로 하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해체의 위기로 치닫고 있는 가족 개념이 이 제도로 말미암아 더욱 부추겨지지 않도록 지혜를 모아야 한다.

지난 연말 국회는 호적에 대한 대안 부재를 이유로 호주제 폐지를 골자로 한 민법 개정안 처리를 뒤로 미뤘다. 이제 대법원의 안은 발표됐다. 법무부도 '신분등록제도 개선위원회'를 발족시킨 만큼 곧 정부안도 나올 것이다. 국회는 새로운 편제를 둘러싸고 호주제 폐지를 둘러싼 갈등이 재연되지 않도록 합리적인 새 신분등록제를 조속히 매듭지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