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로에 선 JP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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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1996년 11월 1일 낮 12시30분, 서울 목동1단지 한신아파트 115동 701호. 기다리던 국민회의 김대중(DJ)총재가 자민련 김용환 의원을 맞이했다. 金의원은 김종필(JP)총재로부터 장래에 대한 전권을 위임받고 DJ의 초대에 응한 것이다.

두 사람은 세시간여 밀담을 나눈 뒤 양손을 마주 잡았다. 이날 DJ의 안가(安家)에선 다음해 대선 때 내각제를 고리로 연합, 공동정부를 세우자는 DJP공조 합의가 이뤄졌다. 34%대 지지율 벽을 넘지 못해 2등에 머물러야 했던 DJ와 독자적 생존이 불가능했던 JP간의 색깔을 뛰어넘는 합작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러나 DJP공조가 정식으로 국민에게 선을 뵈기까지는 1년이 걸렸다. 각기 당헌 개정 등 내부 정비에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으나 이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었다. JP의 몸값 올리기 계산이 주효한 탓이다.

'대선을 포기한 게 아니냐'는 당 안팎의 의구심에 시달리던 JP는 감춰왔던 DJP공조를 그해 연말 슬쩍 내비치기는 했다. 하지만 정식 대국민선언은 대선을 불과 40여일 앞둔 97년 11월 3일에야 이뤄졌다. 국민회의-자민련간 공개적인 합작 논의가 진행되는 중에도 JP는 국민회의 반대세력과의 제휴가능성을 흘리면서 DJ를 부쩍 몸달게 했다. DJ 집권 후 휴지조각이 돼버리긴 했지만 어쨌든 당시 자민련은 동수의 각료 인선권을 약속받는 등 성과를 거뒀다.

이후 졸수(拙手)를 거듭, JP와 자민련은 여론조사 대상에서조차 제외될 만큼 처량해졌다. 한때 정몽준 의원의 중부권 약진을 경계한 한나라당이 연대를 모색하면서 숨통이 열리는가 했으나 이회창 후보가 지난 주말 생각이 없다는 뜻을 분명히 함으로써 다시 정계의 미아가 됐다.

李후보가 캐스팅 보트로서 충청표에 신경을 쓴 것은 사실이다. 충북에서 이긴 후보가 대권 꿈을 이룬 전통도 마음에 걸렸음직하다. 때문에 당 일각에선 JP를 끌어안는 방안을 검토했던 것이다. 그러나 나라 전체적으론 얻는 표보다 더 많은 표를 잃게 된다는 관측에다, 3김 청산과 정치개혁을 외쳐온 李후보의 이미지만 흐릴 것이라는 지적이 나오자 없던 일로 돌렸다. 한나라당에선 JP를 鄭의원과 뭉치게 하고 8명 정도의 자민련 의원을 떼어내 불러들이면 표밭을 다지는 데는 문제가 없다고 본다. '정풍(鄭風)'도 가라앉게 돼 있다고 판단한다.

결국 자신을 포함한 의원 14명을 묶어 패키지 딜을 하려던 JP의 줄타기 구상은 물거품이 됐다.

게다가 鄭의원까지 다른 당에나 눈길을 주면서 자민련엔 '올테면 오라'는 식이다. 이러다간 소속의원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몸값을 올리기는커녕 자칫 떨이 신세가 될 판이다. 벼랑끝에 몰린 JP로서는 아슬아슬하기만한 지금이다.

어려운 상황에 몰리면 출입기자와의 접촉마저 끊은 채 장고하며 때를 기다려온 JP다. 요즘도 유사한 행보를 걷고 있다. 그러나 본인의 기력도, 충청인의 기대도 예전만 아예 못하다. JP가 마음을 비우고 보수세력의 어른으로 남기를 결심한다면 한 시대를 풍미한 정객으로 오래 기억될지 모른다. 물론 한몫을 챙기려 든다면 얘기는 전혀 달라지겠지만-.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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