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5436>제103화人生은나그네길: 40.'작은 거인'조용필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21면

"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님이 아니면 못산다 할 것을/사랑한다고 말할 걸 그랬지/망설이다가 가버린 사람/마음 주고 눈물 주고/꿈도 주고 멀어져 갔네…."

폭발적인 춤과 노래로 1969년 일약 스터덤에 오른 가수 김추자의 '님은 먼 곳에'다. 이 노래는 신중현 작사·작곡으로 71년에 발표됐다. 그야말로 빅히트였다. 신중현·김추자 콤비가 일궈낸 신화였다.

김추자는 이 노래가 나오기 2년 전 '늦기 전에''월남에서 돌아온 김상사'로 데뷔했다. 열여덟살의 하이틴 가수가 온몸을 산화할 듯 열정의 노래를 뿜어내자 팬들은 현기증을 느끼는 충격을 받았다. 그녀를 발굴한 신중현은 "대어감이라는 느낌이 전율처럼 몸을 감쌌다"며 첫 만남의 순간을 회고한 적이 있다.

강원도 춘천의 독립운동가(할아버지) 집안 출신의 김씨는 희대의 '댄스가수'였다. 그러나 춤과 노래가 겉돌지 않고 화학반응을 일으켜 독특한 '김추자표'를 만들었다. 요즘 입 따로 몸 따로 노는 댄스가수와는 감히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로 노래와 춤이 탁월했다. 때문에 적어도 70년대 전반 가요계에서 그녀의 존재는 결코 간과할 수 없다.

70년대 가요계는 내 전성기였던 직전의 10년 세월과는 천양지차였다. 노래의 컬러는 물론 부르는 스타일도 다양했다. 김추자는 그런 격변의 와중에서 '요란한' 한 시대를 갖는 대형가수였다. 남진·나훈아,김추자,그리고 포크 계열의 뭇 가객(歌客)들의 노래를 통해 어두운 시대를 살던 민초들은 위안을 받았다.

그러나 75년 대마초 사건이 터져 많은 가수들이 고초를 겪는 '냉각기'가 찾아왔다. 많은 가수들이 이 사건을 계기로 무대를 떠났다. 나는 가요계의 선배로서 이 일을 원만하게 해결하기 위해 백방으로 뛰었다. 당시 사건 담당이었던 서울지검 조찬형(전 국회의원) 검사를 수없이 찾아가 선처를 부탁하기도 했다. 어쨌든 불행한 일이었지만, 이는 70년대 후반 새로운 가수들이 등장해 왕성한 활동을 펼치는 계기를 제공했다.

작곡가 길옥윤과 손을 잡고 '당신은 모르실거야' 등의 히트곡을 연이어 내기 시작한 혜은이를 비롯해 '오동잎'의 최헌,'밤차'의 이은하,조경수 등 고만고만한 수준의 가수들이 대거 등장해 잠시 침체됐던 가요계를 살리는 기폭제가 됐다.

그러나 어쩌면 이런 '백가쟁명'은 한 걸출한 스타의 탄생을 알리는 전주곡이었는지도 모른다.'작은 거인' 조용필이다. 그는 분명 80년대를, 그야말로 통째로 평정한 인물이지만 시작은 무척 빨랐다. 69년 이미 컨트리웨스턴 그룹인 에트킨즈를 중심으로 미 8군에서 활동을 시작했다. 우리 가요계에는 72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데뷔했다.

나는 이 무렵 그를 처음 알게 됐다. 그룹사운드들이 겨룬 '선데이 팝 그룹 경연대회'에 그가 타악연주자 김대환과 함께 김트리오의 멤버로 참가했을 때다. 심사위원이었던 나는 이 팀에 굉장히 후한 점수를 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굉장히 호소력이 있는 가수라는 생각을 했다.

아무튼 한창 물이 오른 조용필도 대마초 사건을 그냥 비켜갈 수 없었다. 이 사건에 휘말려 욱일승천하던 기세가 꺾일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혹한기를 보내던 조용필은 70년대 후반 들어 재기에 성공한다. 79년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말 그대로 가요계에 컴백홈을 한 것이다. 이후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그의 시대가 활짝 열렸다.

조용필은 고집과 철학이 있는 가수다. 내 기억으로 그는 초창기를 제외하고 반드시 자신의 악단(조용필과 위대한 탄생)하고만 노래를 했다. 노래와 연주가 균형을 이뤄야 한다는 프로의식의 발로라고 생각한다. 이런 고집을 통해 그의 노래는 한층 힘있게 살아날 수 있었다.

노래 외적으로 그와 만나 자주 술을 마시곤 했지만, 그는 자기관리가 엄격한 스타라는 인상을 많이 받았다. 그건 아마도 정상을 목전에 두고 겪었던 '쓴맛'을 철저히 자기발전의 자양분으로 삼았기 때문일 것이다. 고진감래라는 말은 아마 그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닌가 한다. 80년대 가요계가 풍성함을 유지할수 있었던 것은 그의 인내와 시련에 대한 보상이었다.

정리=정재왈 기자 nicolao@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