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韓·中 문화교류의 대동맥:山海關 열린 문엔 韓流 흐르는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4면

선양을 떠나 헤이산(黑山)을 거쳐 의무려산(醫巫閭山)이 있는 베이닝(北寧)으로 향하는데 랴오허(遼河)를 건너면서 우리는 요서(遼西) 땅으로 넘어선 것이었다. 요서평야 또한 광활하기 그지없었다. 사방이 지평선으로 둘러싸인 채 그 한 가운데를 달리니 차창 밖 풍광이 변하는 것이라곤 어느 순간부터 옥수수밭이 논으로 바뀐 것밖에 없었다. 그래서 추사 김정희는 '요야'(遼野)라는 시를 지으며 "하늘 끝은 어디메로 돌아갔는가/여기에 와서 보니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알겠네"라고 읊었다.

그렇게 세시간을 달려 헤이산에 이르니 들판 저 너머로 검푸른 산맥이 낮은 포복의 자세로 모습을 드러냈고 반시간쯤 뒤 북령시에 다다랐을 땐 준수하고 신령스런 의무려산이 환한 웃음으로 우리를 맞아주었다. 그 상쾌한 기쁨을 연암 박지원은 "진한 음식에 지쳐 있을 때 문득 밥상 위에 오른 야채 한 접시" 같았다고 했다.

의무려산을 등지고 자리잡은 베이닝시 한쪽 언덕받이에는 북진묘(北鎭廟)가 궁궐처럼 권좌를 틀고 있다. 먼 옛날 순(舜)임금이 중국의 명산 12곳에 진묘를 세우면서 의무려산을 동북지방의 진산으로 삼고 산신령에게 제사지내는 묘당으로 세운 것이다. 우리로 치면 계룡산 중악단(中岳壇) 같은 것으로 중원의 입장에서 보면 만주땅을 경영하는 거점 진지였던 것이다.

묘당 안에는 건륭제가 연경과 선양을 오갈 때마다 여기에 들러 지은 시를 새긴 56개의 비석이 정전(正殿) 앞마당에 3열 횡대로 늘어서 있다. 이광호 교수는 그 중에서도 의무려산엔 "조선인들이 새긴 글이 많다네"라는 구절이 새겨진 비석을 바로 찾아내 우리를 흥분케 했다.

베이닝시는 오늘날 중국인조차 별로 찾아오지 않는 만주족 자치구의 작은 도시에 불과하지만 답사처로는 보고(寶庫) 같은 곳이었다. 시내에는 요나라 때 세운 숭흥사(嵩興寺) 쌍탑이 그림처럼 서 있고,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인 이여송(李如松)의 아버지로 영원백(寧遠伯)을 지낸 이성량(李成樑)의 묘도 있다.

더욱이 한국인으로서는 남다른 감회가 있는 곳이다. 김창업은 『노가재연행록』에서 고구려 석관묘 얘기를 들은 대로 기록하며 후대 학자가 규명해 달라고 했는데 1974년에 발견된 평양 덕흥리 벽화무덤은 바로 이곳 유주(幽州) 자사의 무덤이고 보면 여기가 고구려의 영역이었음이 분명해진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여기는 홍대용의 명저 『의산문답(醫山問答)』의 무대다.

꽁생원 같은 허자(虛子)라는 인물이 허세를 떨치다가 결국은 이곳 의산(의무려산)에 와서 실옹(實翁)을 만난 뒤 깨우침을 얻는다는 철학적 소설의 고향인 것이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가 있기에 열하가 우리 뇌리에 살아있듯이 홍대용의 『의산문답』이 있는 한 베이닝의 의무려산은 우리의 가슴 속을 떠날 수 없는 것이다. 모든 면에서 여기는 연행록 답사의 하이라이트였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고 아름다운 저녁 노을이 홍채를 짙게 뿌리는 것을 보면서 우리는 온갖 상념을 뒤로 하고 베이닝을 떠났다. 그리고 밤늦게 진저우에 다다랐을 때 어둠 속의 긴 다리를 건너 시내로 들어섰다. 지나고 나서 보니 우리는 역사의 강, 대능하를 건넌 것이었다. 대능하! 역사학자들은 여기가 고조선의 중심지였다, 아니다, 경계선이었다 라며 제각기 학설을 펴고 있지만 분명한 것은 비파형동검으로 상징되는 중국과는 완연히 다른 동북아 청동기문화를 꽃피웠던 지역이다.

대능하의 진저우부터 산하이관까지는 줄곧 발해만을 타고 내려가는 길이다. 길은 육지 쪽으로 들어와 있어 바다를 볼 수 없었지만 그래도 혹 나타날까 싶어 나는 고개를 한시도 오른쪽으로 돌리지 못했다.

산하이관은 천하제일관이라는 명성에 값하는 위용을 갖추고 있었다. 진시황이 처음 쌓고 명나라 서달(徐撻)이가 새로 축성한 이 산하이관은 만리장성의 출발점으로 우뚝 솟은 각산(角山)을 타고 올라 연산(燕山)산맥을 따라 치달려 베이징 북쪽 팔달령 장성을 거쳐 둔황(敦煌)의 옥문관(玉門關)까지 1만리로 뻗어 있다. 그중 유독 산하이관만이 바다와 맞닿아 장성의 성벽이 발해 바다 속까지 뻗어 노룡두(老龍頭)가 되고 징해루(澄海樓)라는 망해루를 낳았다.

만리장성은 마오쩌둥(毛澤東)이 일찍이 "장성에 오르지 않으면 장부가 아니다(不到長城非好漢)"라고 했듯이, 중국의 상징이자 자랑이다. 그러나 각산장성에 올라 발해만을 굽어보는 내 심정은 달랐다. 당신네들은 장성을 쌓으며 중원을 보호해 동아시아의 주도권을 그렇게 2천년간 누렸지만 당신네들이 잠자는 동안 동아시아의 세계적 위상이 낮아진 것은 결코 중국만의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럽은 문화의 주도권이 계속 바뀌었다. 16세기 이탈리아에서 17세기 스페인과 영국으로, 18세기엔 프랑스로, 19세기엔 독일로, 그리고 지금은 아마도 미국으로, 그러나 동아시아는 잘 하나 못 하나 중국이 쥐어왔다.

20세기 들어와 일본이 그 위치를 차지했으나 그들은 제국주의로 변질했기 때문에 도덕적으로 동아시아 문화를 이끌어갈 자격을 상실했다. 더욱이 그 잘못을 시인하지 않는 한 주변국들이 용납할 수도 없는 일이다. 그러면 한국은?

한·중 수교 10주년. 이제 세월이 바뀌어 산하이관 열린 문으로 이미 한류(韓流)가 깊이 들어가 있다. 문명은 강물처럼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흘러간다. 선양의 한 고층 아파트에는 '한국식 공법'이라고 자랑스럽게 쓴 현수막이 나부끼고 있었다. 모두들 말하기를 중국은 우리보다 10년 이상 뒤떨어졌다고 한다. 그것은 연행사신과 우리의 길 사이에 있는 뚜렷한 차이였다. 그 사실의 의미를 지금 중국도 한국도 올바로 간취하지 못하고 있다.

중국은 만리장성 밖의 문명을 존경해본 적이 없어 우리의 월드컵 축구 4강 진출을 그렇게 시기했다. 우리는 우리대로 중국에 영향을 주어본 역사적 경험이 없기에 중원에 부는 한류를 어떻게 살려내 동아시아 문화에 기여할 수 있을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한국은 동아시아 문화권의 주변부에서 중심부로 전환하기엔 너무도 준비가 모자랐다. 이제 동아시아의 생존과 영광을 위해 우리는 어떤 자세로 임해야 할까. 홍대용의 『의산문답』은 우리에게 이렇게 충고하고 있다. 허자(虛子)의 허상을 버리고 실옹(實翁)이 되라고.

협찬 : LG

선양(瀋陽)에서 베이징(北京)까지는 7백70㎞의 징선(京瀋)고속도로가 뚫려 8시간이면 닿을 수 있다. 그러나 연행(燕行) 사신들은 나귀로 20일이나 걸린 1천5백리 길을 우리는 버스로 가면서도 대능하(大凌河)의 진저우(錦州)에서 하루, 산하이관(山海關)의 친황다오(秦皇島)에서 하루를 묵고 난 후에야 다다른 긴 여정이었다. 그리하여 연행 사신들이 연경(燕京)의 조양문(朝陽門)으로 입성하면 옥하관(玉河館)이라는 조선관에 여장을 풀고 보통 두 달간 사신은 외교 활동을, 학자들은 유리창(琉璃廠)을 드나들며 학예 교섭을 벌였다. 그런 중 18세기 건륭제는 곧잘 연경에서 동북쪽 2백56㎞ 떨어진 승덕(承德)시 열하(熱河)에 있는 피서산장(避署山庄)에 가 있는 바람에 몇차례는 거기까지 가야만 했으니 박지원과 서호수의 연행록이 『열하일기』로 나오게 된 것이다. 우리의 여정은 거기를 종점으로 삼고 그들의 뒤를 쫓아갔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