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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의 '인도적 돼지고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돼지도 인도적으로 살다가 죽을 권리가 있다. 고로 도살장으로 가는 돼지는 8시간 이상 이동해서는 안된다'.

올해 5월 15일부터 덴마크가 도입한 자율 규제다. '동물 복지(Animal Welfare)'에 대한 관심과 요구가 커지면서, 특히 영국 등 유럽 각국의 소비자들이 '인도적으로 도살한' 돼지고기를 찾기 시작하면서 덴마크가 수출 시장을 잃지 않으려 스스로 취한 조치다.

덴마크는 세계 최대의 돼지고기 수출국이다.

지난해에는 전체 돼지 생산의 85%를 수출했는데, 그 금액이 자그마치 39억유로였다. 우리 돈으로 약 4조8천억원, 우리의 1천5백∼3천cc 세단 한해 수출과 맞먹는 규모다. 이 '인도적으로 살다 간 돼지'들은 덴마크 수출의 효자다. 전체 수출의 약 7%가 돼지고기며, 이는 전체 농축산물 수출의 절반이나 된다. 우리나라가 돼지고기를 사오는 나라들 중 2위도 덴마크다. 우리가 즐기는 삼겹살의 약 2%는 덴마크 산이다.

지난주 덴마크의 수도 코펜하겐에서 열린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에 한국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한 황두연 통상교섭본부장은 짬을 내 대표적인 덴마크 기업 두 곳을 둘러보았다.

B&K.

소리 진동을 측정하는 기술 하나로 세계시장을 파고든 이 기업은 현대자동차도 주요 고객 중 하나다. 엔진 소음이 과연 어느 부분에서 나오는지를 찾아내 그것을 어떻게 잡을 수 있는지를 제시한다. 타이어·오디오·공연장 등 기술 적용 분야는 무궁무진하다.

노보 노르디스크.

당뇨병 약 하나로 세계를 파고든 이 기업은 현재 전세계 당뇨병 약의 40% 정도를 공급하고 있다.

덴마크는 더 따져볼 것도 없이 소국(小國)이다. 한반도 면적의 5분의 1인 국토에 5백30만명이 살고 있다. 그러나 1인당 국내총생산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3만달러가 넘는다. 이른바 강소국(强小國)인 것이다.

한때 국내에서 덴마크를 배우자는 바람이 불었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새마을 운동을 시작하면서다. 척박한 땅에서 세계적 낙농국가를 일군 덴마크의 사례가 국민학교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그게 1960년대였다.

이후 우리 나름의 개발 모델을 채택하면서 덴마크는 우리의 관심에서 멀어졌지만, 40여년이 지난 지금 덴마크는 현재의 우리 입장에서도 얼마든지 새롭게 다시 볼 수 있는 나라다.

우리가 그네들을 배우자고 했던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덴마크는 전형적 농업 국가였다. 제조업은 보잘 것 없었다. 그러나 60년대 말 이후 현대적 산업국가가 되고자 하면서 우리와는 사뭇 다른 길을 걸었다.

주덴마크 한국대사관 자료에 따르면 이제 덴마크 전체 산업에서 농업이 차지하는 비중은 3.3%에 지나지 않는다. 농업인구도 (전체 인구가 아니라) 노동인구의 5%밖에 되지 않는다. 그러면서 일찍부터 적극적 개방에 나섰고, '작지만 정상급'(small but top)을 목표로 기술집약·두뇌집약 산업에 주력했다. 노사 관계는 유럽에서 가장 안정돼 있다.

황두연 본부장이 방문했던 B&K에서 "어떻게 이 분야의 세계 제1이 되었는가"라는 질문을 받은 최고경영자는 이렇게 답했다고 한다. "인구 5백만명이 먹고 살려면 이 길밖에 없다. 뭐 하나라도 세계 톱이 될 때까지 파고들 수밖에."

한국도 얼마든지 돼지 수출국이 될 수 있다. 우리 기후에서 자란 돼지는 육질이 좋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구제역이 발생하기 전부터도 돼지고기 수입이 수출보다 많았다. 구제역 이후로는 그나마 수출이 뚝 떨어졌는데, 덴마크는 구제역 수준을 훨씬 넘어 '인도적 돼지 고기'를 팔고 있다.

뉴라운드 시대에 개방·농업구조조정과 함께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가가 우리가 해결해야 할 난제들이다. 반면 일찍부터 그런 고민을 스스로 했던 덴마크에 뉴라운드는 새로운 기회다.

코펜하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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