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트 무버로 가는 길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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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7호 30면

애플·구글·아마존·닌텐도·넷픽스…. 이들은 정보기술(IT) 시장에서 일종의 ‘퍼스트 무버(First Mover)’로 통한다. 퍼스트 무버는 ‘창의적 시장 선도자’라고 정의할 수 있다. 글로벌 과학전쟁 시대로 일컬어지는 지금, 국가 차원의 연구개발(R&D) 전략도 퍼스트 무버를 염두에 두고 변모해야 한다는 요구가 커지고 있다. 얼마 전만 해도 대한민국의 R&D는 ‘패스트 팔로어(Fast Follower:발 빠른 추격자)’였다. 선진 기술의 도입이나 모방을 통한 기술 격차 축소가 급했기 때문이다.

이런 흐름 때문에 국가 차원의 R&D 방향 설계와 투자·지원도 상당한 변화를 맞이하고 있다.

돌아보면 1963년 처음으로 국가 과학기술 종합계획이 수립될 때 R&D 투자 규모는 당시 12억원에 불과했다. 이것이 2007년엔 31조3014억원으로 늘어났다. 국내총생산(GDP)에 대비하면 연구개발비 비중은 3.47%에 이른다. 절대 규모로는 미국(369조원)·일본(149조원)·독일(84조원)에 턱없이 못 미치지만 GDP 규모를 감안하면 이스라엘·스웨덴에 이어 세계 3위 수준이다. R&D 확대 덕에 SCI(과학논문인용색인) 기준 한국의 발표 논문 수는 매년 꾸준히 늘어나 2008년 3만5569편(세계 12위)을 기록했다. 또한 국내 연구인력은 99년 13만5000명에서 10년 만인 2008년 30만 명으로 증가했고, 특허등록 건수도 4위를 차지해 대한민국 R&D의 달라진 역량을 말해 주고 있다.

그러나 SCI 논문 피인용 수 30위, 국제특허수지의 적자 규모 확대 같은 사례를 보면 질적인 면에선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2008년 SCI 발표 논문 수가 세계 12위이긴 하지만 재료과학·컴퓨터과학 등 공학 분야의 논문 수만 10위권에 들어 있을 뿐 물리를 제외한 기초과학 학문 분야는 10위권 밖이다. 휴대전화 CDMA 원천기술과 관련해선 95년부터 11년간 3조원의 로열티를 외국에 지불해야만 했다. 국가경쟁력과 국격을 높이기 위해서는 기초 원천기술 확보가 관건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사람과 세상을 이롭게 할 과학에 대한 체계적이고 장기적인 투자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지식과 기술의 융합시대를 맞아 차세대 성장동력을 찾고, 미래를 담보할 원천기술을 확보하려면 R&D에 대한 투자는 더 넓게, 더 깊게 추진돼야 한다.

우리 정부는 ‘R&D 선진화’를 위해 창조형·개방형·질적 성장 중심이란 연구개발 방향을 정해 놓고 있다. 2012년까지 R&D 투자를 16조6000억원까지 늘리되 이를 기초·원천연구에 50% 배분할 계획이다. 연구자 중심의 추진체계 구축을 위해선 민간의 참여·협력을 확대하는 개방형 R&D 시스템을 추구할 계획이다. 연구 결과가 목표에 미치지 못하더라도 성실하게 연구했을 경우 이를 포기하지 않고 성과를 낼 수 있도록 장려하는 ‘성실실패제도’를 도입하고 창출된 성과에 대해 인센티브를 강화하는 등 평가제도를 개선할 방침이다.

이와 함께 연구자들이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혁신을 추구하고 있다. 연구개발은 짧게는 수십 년, 길게는 수백 년이 걸릴 수도 있는 장거리 경주다. 이것을 주도하고 앞장서야 할 이들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 연구자들일 것이다. 그들이 ‘할 수 있다’는 자신감과 대한민국의 미래를 책임진다는 자부심을 갖고 연구에 매진할 수 있도록 우리 모두의 응원이 필요하다.

‘과학’ 없이는 녹색성장도 일류국가의 꿈도 요원할 수밖에 없다. 암 정복, 생활도우미 로봇, 하이브리드자동차, 종이 노트북 등 생각만 해도 가슴 뛰는 미래 생활의 변화는 과학에 대한 투자와 선진화를 위한 준비에서 시작된다. 대한민국 과학이 창의적 선도자의 면모로 도약하기를 염원해 본다.



박항식 연세대 졸업(81년) 뒤 행정고시(25회)에 합격해 과학기술부·기상청 등에서 일해 왔다. 주요 논문으로는 ‘수소 경제사회를 위한 수소·연료전지 기술 개발 정책’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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