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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詩)가 있는 아침 ] -'정든 땅 언덕 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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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오규원(1941~ ), 「정든 땅 언덕 위」 전문

1
죽은 꽃들을 한 아름 안고
門 앞까지 와서
숙연해지는 들판.
그 언덕 위에
건강한 男子들이 휘두른
두 팔에
짤려진 채
그대로 남아있는
木柵(목책).

홀아비로 늙은 三植이의
초가집
뜰이
풀잎 위에 떠 있다.
드문드문 떨어져
나즉하게
오보에를 부는 나무들이
요즘도 살고 있는 골짜기로
올해 들어 첫 번째로
하늘의 一部가 열리고
종종종……
古典的(고전적)으로 내리는 비.
그때 10년만에
부시시 눈을 뜨고
한 발로 파도를 누르는 山.
그때 10년만에
처음으로 잠드는 바다.

2
언덕 위
비극의 내 生家(생가).
나의 과거를
부르는 놈은
숲에서 뛰어나온
裸體(나체)의 山이다.
옆집 창문으로 들어온
산돼지다.
뜰과 나무 잎 뒤에서
방의 壁紙(벽지) 뒤에서
노려보는 놈은
꽃이 될 悲劇(비극)이다.
글쎄, 당신은 모른다니까
내가 무슨 노래를 하는지.
글쎄, 이빨 사이에 끼인
죽은 바다는 빼냈다니까.

3
건너마을의 金씨가 찾아왔다
金씨를 만나면
그의 살 속 여윈 뼈가 보인다.
얼굴의 광대뼈가
빌딩의 사각창보다
외로운 각도다.

金씨가 오면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가 있는 곳은 여름
여름 속의 양철집.
그를 따라다니는 것은
부러진 나뭇가지에서 상처를 입은
바람.
그가 오면 햇빛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햇빛 속에 사는 나를 비웃는다.


직선은 어떤 선보다 힘이 세고 폭력적이다. 두 직선이 만난 직각의 모서리는 날카롭고 딱딱하다. 고층빌딩이 엄청난 하중을 견디자면 많은 직선과 직각이 필요할 것이다. 시인은 김씨의 광대뼈에서 빌딩의 사각창과 같은 직선과 직각을 읽어낸다. 그 각도는 김씨의 외로움과 공격적인 심리를 동일한 양감과 질감으로 드러낸다. 그 외로운 각도는 햇빛이 없는 곳에 살면서 햇빛 속에 사는 사람을 비웃는다.

김기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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