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주특구 초대 행정장관 양빈]인생과 사업 : 귤 한번 먹고싶어 "돈벌겠다" 모진 결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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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북한 신의주 특구의 초대 행정장관에 임명된 양빈(楊斌) 어우야(歐亞)그룹 회장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고 있다. 다음은 楊장관의 어린 시절부터 최근까지의 행적을 주변 인물들의 증언과 주장을 토대로 정리한 것이다.

편집자

양빈은 1963년 중국 장쑤(江蘇)성의 성도(省都)인 난징(南京)에서 태어났다. 그러나 다섯 살 되던 해 부모를 모두 여의고 할머니 슬하에서 인생 행로를 시작해야 했다. 할머니는 새벽부터 달여 준비한 차(茶)를 길거리에서 팔아서 자신과 어린 손자인 楊의 생계를 유지했다.

楊이 얼마나 가난에 시달렸는가를 말해 주는 일화가 있다. 어릴 적에 옆집의 한 아이가 맛있게 귤을 먹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너무나 먹고 싶은 생각에 군침만 흘렸다. 이 광경을 본 할머니는 楊을 불러 비장한 어조로 말했다."우리는 가난하기 때문에 귤을 사먹을 수가 없단다. 앞으로 네 미래는 네가 하기에 달려 있다." 그때부터 楊은 귤을 한번 먹어 보기 위해서라도 출세만은 꼭 해야겠다고 결심을 굳혔다고 한다.

楊은 부모가 돌아간 다섯 살 때부터 성인이 되기 전인 18세 때까지는 고기를 거의 먹어보지 못했다. 때문에 지금도 육류 요리에는 별 식욕을 못느낀다고 한다. 양빈이 고등학교를 마치고 여느 대학교에 진학하는 대신 해군 제2포병학원을 선택한 것 또한 생활고에 기인한다.

미국의 포브스지가 지난해 중국 부호 2위로 올려 놓았음에도 楊은 아직까지 검소한 생활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사시사철 똑같은 차림새이고 구두는 해질 때까지 신는다.

楊은 삶을 살아가는 데 중요한 몇가지 노하우들을 갖고 있다.

첫째는 인간관계의 중요성이다. 그는 성공 여부는 타인과의 관계를 어떻게 처리하느냐에 달려 있다는 점을 일찍 깨달았다. 楊은 랴오닝(遼寧)성의 보시라이(薄熙來)성장과 막역한 사이다. 보시라이는 중국공산당 원로인 보이보(薄一波)전 국무원 부총리의 아들로 이른바 '태자당(太子黨·중국 고위층 자제)'이며, 楊장관이 중국에서 사업을 시작할 당시에는 다롄(大連)시장이었다. 리란칭(李嵐淸)부총리도 그의 후원자로 알려졌다.

둘째는 고통 속에 얻은 강인한 정신력과 포용력이다. 양빈은 "남이 없으면 나도 있을 수 없고 사회가 없으면 개인 또한 있을 수 없다"고 즐겨 말한다.

해군 제2 포병학원을 졸업하고 잠시 학교에 남아 교편을 잡았던 楊은 87년 네덜란드의 라이든 대학에 유학, 90년 정치경제학 석사학위를 취득하는 등 이때까진 공부에 정열을 쏟았다. 그가 사업의 길로 들어서는 것은 91년 폴란드에서 레흐 바웬사가 대통령에 당선돼 전면적인 개방을 제창한 것과 시점을 같이한다.

楊은 네덜란드에서 한푼두푼 모은 1만달러를 밑천으로 바르샤바에 폴란드 최초의 개인회사를 차렸다. 무역업을 위주로 하는 이 회사는 楊의 고향인 장쑤성 일대의 향진(鄕鎭)기업으로부터 저가의 의류와 일용품을 구입해 폴란드에서 파는 비교적 단순한 장사로 적지 않은 수입을 챙겼다. 이를 토대로 楊은 이번엔 중국의 가전제품과 완구 등을 동유럽 국가와 러시아 등에 팔아 큰 이익을 남기게 된다. 楊은 불과 2년 만에 1만달러로 시작한 사업을 2백50만달러 규모로 키우는 데 성공했다.

자본을 모은 楊은 네덜란드에 '네덜란드 어우야(歐亞)회사'를 등록, 설립해 본격적인 사업가의 길로 들어섰다. 楊에 따르면 폴란드에서 손쉽게 돈을 벌고 또 기타 동유럽 국가에서도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이 이들 국가를 잘 알고 특히 경쟁을 회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경쟁 대상이 없는 영역에서 사업을 발전시키는 '땅짚고 헤엄치기'가 얼마나 유용한지를 터득했다.

그러나 중국산 제품을 들여다 팔면 큰돈을 벌 수 있다는 소식이 중국 유학생들 사이에 좍 퍼지면서 楊의 좋은 시절도 끝나게 된다. 이 때부터 楊은 두 번째 사업거리를 포착했다. 네덜란드 선진 농법을 중국에 옮겨놓는 일이었다.

楊은 면적은 고향인 장쑤성의 5분의2에 불과하며 인구는 1천6백여만 명으로 베이징(北京)과 비슷한 네덜란드가 세계 7위의 무역 대국으로서 1인당 국내총생산(GDP)가 2만5천달러에 달하는 이유에 큰 관심을 가졌다.

楊은 네덜란드의 유명하다 싶은 야채, 또는 화훼 업체를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찾아다녔다. 이들 업체의 노하우는 두 가지, 온실과 냉장기술이었다. 楊은 마침내 92년 말 네덜란드의 선진 농업기술을 중국에 이전할 경우 발전 가능성이 클 것으로 판단해 중국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당시 많은 네덜란드 친구들이 楊의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고 한다. 유럽에서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됐는데 왜 다시 오지로 들어가느냐는 것이었다. 중국인으로 알려진 楊의 부인과 두 자녀는 지금도 네덜란드에 살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楊은 93년 네덜란드의 회사 두개를 인수했다. 하나는 온실설비 생산기업이고 다른 하나는 냉장회사였다. 楊은 이들 두 회사를 네덜란드 농업의 중국 이전 발판으로 삼았다. 94년 3월까지 네덜란드의 어우야 그룹은 베이징과 상하이(上海)·우한(武漢)·선양(瀋陽)·청두(成都) 등 중국 전역에 14개 지사를 설립하고 네덜란드 화훼를 중국으로 수출하기 시작해 한때 중국 화훼시장에서 유통되는 생화의 70%를 장악하기도 했다.

楊은 또 저가 정책으로 네덜란드의 경쟁 업체들을 따돌리고 온실 설비를 중국에 수출해 단시일 내 중국 온실 설비 시장의 90%를 점하는 등 엄청난 이윤을 취할 수 있었다. 94년께 楊의 개인 자산은 이미 1억달러를 초과, 탄탄한 자금력을 갖추게 됐다.

돈이 생긴 楊은 세번째 도전에 돌입했다. 네덜란드 선진농법을 구현하는 고소득 농촌마을 '네덜란드촌(荷蘭村)'의 중국 내 건설에 들어간 것이다.

98년 楊은 랴오닝(遼寧)성 선양의 샤오한툰(小韓屯)이라는 마을에 1억5천만위안을 주고 3천3백무(畝·약 67만평)의 토지를 구입했다. 楊의 계산에 따르면 네덜란드의 현대적 농업 모델은 원가 투입이 매우 커 1㎡의 온실을 건설하는 데만 약 1천위안을 투입해야 한다. 네덜란드촌의 온실 면적은 54㏊(약 16만3천평)로 5억4천만위안이 필요하며, 냉장창고 등 부대 시설과 생산원가를 더하면 엄청난 돈이 들어간다. 하지만 일단 건설만 이뤄진다면 발전 가능성이 무한하다는 게 楊의 계산이다.

楊은 무엇보다 생산원가가 싸다는 데 주목하고 있다. 1㎏의 토마토 생산원가를 예로 들면 네덜란드촌이 0.25위안(약 37원)인데 반해 네덜란드는 1.6위안, 일본은 무려 4위안에 달한다는 것이다. 그는 가격경쟁력을 발판으로 일본의 야채·화훼 시장을 공략할 작정이다.

楊은 또 네덜란드촌을 관광업·부동산업을 겸한 곳으로 만들려 한다. 농업을 주제로 한 테마공원도 계획 중이다.

그러나 네덜란드촌은 '광대한 부동산 투기장'으로 변질됐다는 지적도 많다. 지난해 봄 착공한 네덜란드촌은 한때 7천명의 인부가 동시에 작업을 하기도 했으나 현재는 1백여명이 남아 공사장을 지키고 있다. 건설에 필요한 총자금은 70억위안(약 1조5백억원)이다. 이미 20억위안 가량을 쏟아부었고, 필요한 자금 조달을 위해 어우야 그룹의 중국 지사 일부를 매각하고 있기도 하다.

楊은 현재 네덜란드촌 건설부지의 용도변경 과정과 탈세 관련 의혹으로 구설에 휩싸여 있다. 이런 소문이 퍼지면서 자금조달이 어려워졌고, 이 때문에 네덜란드촌 조성사업도 답보상태다.

베이징=유상철 특파원

scyoo@joongang.co.kr

<양빈은…>

1963년:중국 장쑤(江蘇)성 난징(南京) 출생

68년:부모 모두 사망, 할머니가 키우기 시작

81년:해군 제2 포병학원 입학(졸업 후 포병학원서 잠시 강의)

87년:네덜란드 라이든 대학 입학

89년:천안문(天安門)사태 후 네덜란드 국적 취득

90년:라이덴 대학 정치경제학 석사 졸업, 네덜란드서 의류 판매업체 '유럽국제무역회사'설립

91년:폴란드 최초의 개인회사를 바르샤바에 설립, 중국·폴란드 간 의류 등 중개무역

93년:온실 설비 생산업체·냉장업체 등 네덜란드 회사 2개 인수

94년:화훼생산·중개무역업 '네덜란드 어우야(歐亞)회사' 설립, 중국 전역에 14개 지사 개설

98년:랴오닝(遼寧)성 샤오한툰(小韓屯) 마을 '네덜란드촌(荷蘭村·네덜란드 빌리지)'으로 개발 시작

2001년:어우야 그룹 홍콩 증권거래소 상장, 포브스지 중국 내 2위 부자로 선정

2002년7월:중국 인민일보 "어우야 그룹 탈세 혐의로 당국이 조사 중" 보도

9월:북한 신의주 특별 행정구 초대 장관 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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