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당 할 각오 왜 못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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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생즉사(生卽死) 사즉생(死卽生). 살려고 발버둥치면 죽을 것이요, 죽기를 각오하면 살 길이 생긴다." 이런 뜻의 교훈이 담긴 서적은 동서고금의 종교경전뿐 아니라 충무공 이순신의 『난중일기』 등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굳이 거룩한 서적을 늘어놓을 것도 없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위기가 곧 기회"라며 위기를 역전의 발판으로 활용했고, 김대중 대통령도 야당시절 어려움이 닥칠 때마다 이 말을 곧잘 사용했다.

요즘 민주당은 이 말을 되새겨봐야 한다. 처음엔 친노(親盧)와 반노(反盧)로 갈라지더니, 이제는 친노와 통합신당 추진 탈당불사파, 비노(非盧)와 중도관망파에다 구당파(救黨派)까지 생겨났다. 민주당 출입기자들조차 헷갈릴 정도다. 이젠 민주당 내 일부 친노파 의원들조차 "10월 말이나 11월 초까지 가봐서 盧후보와 정몽준(鄭夢準)의원 중 지지도가 높은 쪽으로 단일화해야 한다"는 말도 서슴없이 하는 실정이다. 이런 민주당의 모습은 지역감정 때문이었건, 다소 진보적인 노선 때문이었건 그동안 민주당을 아끼고 지지해온 사람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있다. 이래서는 미래가 없다.

물론 정당의 목표가 집권인 만큼 대선 승리를 향해 온갖 모색을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대선후보 경선 때 '노풍(盧風·노후보 바람)'을 일으킨 진원지로서 스스로 '제2의 광주혁명' '명예혁명'이라고 자부했던 광주의 상당수 시민들조차 "盧·鄭이 합쳤으면 좋겠다" "한나라당 이회창후보를 이길 수 있는 후보에게 힘을 몰아주겠다"고 하고 있는 판이니 민주당 의원들로서는 흔들릴 만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정당사상 초유의 국민경선을 통해 선출했다고 자부했던 대선후보를 선거도 치르기 전에 갈아치우겠다고 나서는 것이 정당화되는 것은 아니다. 그런 식으로 간다면 대선이 끝난 뒤, 어쩌면 대선 전에 민주당은 흔적조차 남지 않고 소멸할지 모른다. 鄭후보는 최근 "한국 정치는 지나치게 명분을 중시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명분 없는 정치인은 정치꾼이 되고, 명분 없는 정당은 거품으로 스러져갔다. 실용주의는 흔히 명분이 없을 때 동원되는 미사여구에 불과하다.

지금 민주당의 분란은 일부 최고위원의 당권 욕심 때문이거나 정권 상실에 따른 두려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권력과 넉넉한 정치자금을 포기해야 한다는 걱정에, 자신들의 비리나 축재가 드러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에, 정권을 뺏기면 다시 집권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는 우려가 혼합돼 의원들을 '생즉사'의 길로 몰아넣는 것 같다. "이회창 후보가 당선되면 이민 갈 것"이라는 천용택 의원의 발언은 이런 민주당 의원들의 심리상태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다.

민주당은 유산이 많은 정당이다. 한국 정치사에서 진보세력을 끌어안아 진정한 정권 교체를 이룩했으며, 한 소외된 지역의 맺힌 한을 풀어주었으며,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화운동을 끌어왔다. 그렇게 죽을 쑤어도 민주당 지지도는 20% 안팎을 유지하고 있다.

물론 DJ정권의 잘잘못에 대한 평가도 민주당이 안고가야 할 몫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盧후보의 비전과 국정운영 능력은 이렇고, 현 정권의 잘못은 저렇게 바로잡겠으니 미워도 다시 한번 표를 주시오"라고 당당하게 호소할 수 있어야 한다는 얘기다.

그러다 선거에서 지면 야당 할 각오를 하면 된다. 명분의 한줄기를 끝까지 붙잡고 가기만 한다면 2004년 총선에선 지금 비슷한 의석을 유지하거나,어쩌면 제1당이 될지도 모른다. 우리 국민들은 집권당에 후한 점수를 좀처럼 주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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