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회 시늉만 낸 2차 기업 퇴출>DJ, 경제위기說 돌자 "다시 구조조정 하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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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0면

"너무 적지 않습니까."

2000년 10월 21일 여의도 금융감독위원장실. 정기홍 금융감독원 부원장의 보고를 받은 이근영 금감위원장이 되물었다. 정기홍은 이날 은행들이 골라낸 퇴출기업 명단을 보고하던 중이었다. 명단에는 20여개의 이름없는 중소기업들만 적혀 있었다.

"그렇습니다. 은행들이 아직도 옛날 행태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채권단에게 부실기업을 더 엄격하게 다시 평가하도록 하세요."

이근영은 명단을 퇴짜 놓고, 재평가를 지시했다. 11·3 기업퇴출을 10여일 앞둔 시점이었다.

정기홍의 회고.

"은행들은 덩치 큰 부실기업의 퇴출에 소극적이었다. 큰 기업이 퇴출되면 돈을 빌려준 자신들도 덩달아 부실해질 것을 겁내서였다. 2년 전인 1998년 6월, 1차 퇴출 때와 비슷했다. 금감원이 퇴출 대상을 다시 선정하라는 공문을 은행들에 보내면서 부실기업을 살려준 사실이 드러나면 엄중하게 책임을 묻겠다고 경고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2년 전 1차 기업 퇴출 때 정부는 "앞으로 정부주도의 대규모 퇴출은 없다"고 공언했다. 이런 약속을 스스로 뒤집고 정부가 다시 대규모 퇴출 세리머니를 벌이게 된 이유는 뭘까.

99년 대우사태에 이어 2000년 5월 현대사태가 터지면서 당시 자금시장엔 불안감이 나날이 증폭됐다. 급기야 DJ는 8·7개각으로 경제팀을 바꾸고 국면전환을 꾀했지만 상황은 좀처럼 좋아지지 않았다.

진념 당시 재경부 장관과 이근영 금감위원장 등 새 경제팀은 이런 시장 불안을 한번에 정리할 궁여지책으로 2차 기업퇴출을 들고 나온 것이었다.

이는 또 2차 구조조정을 위해 50조원의 공적자금을 추가 조성하려던 당시 경제팀이 공적자금 투입의 명분을 쌓기 위해서라도 꼭 거쳐야 할 절차였다.

김석동 당시 금감위 법규총괄과장(현 금감위 감독정책1국장)의 회고.

"2년 전 1차 퇴출 때 은행 등의 부실을 충분히 청소해주지 못했다. 여기에 대우사태가 겹치면서 금융부실 문제가 더 심각해졌다. 이런 부실의 고리를 완전히 끊으려면 기업 부실을 낱낱이 밝히고 정리한 뒤 그 하수구 격인 금융기관에 공적자금을 충분히 넣어줘야 했다."

이는 당시 경제팀으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이헌재 전 재경부장관의 회고.

"현대사태 등으로 시장은 정부의 구조조정 의지를 믿지 않았고, 외국에서도 비난 여론이 높았다. 이런 시각을 일거에 바꿔놓으려다보니 대규모 기업 퇴출 세리머니가 필요해진 것이었다. 당시는 강화된 여신관리기준(FLC)과 채권시가평가제가 이미 작동 중이라 굳이 세리머니를 하지 않아도 시장에서 부실 기업은 자동 도태되도록 돼 있었다."

경제 위기설이 증폭되자 DJ는 "경제는 직접 챙기겠다"며 2000년 말까지 2차 금융·기업 구조조정을 매듭지으라고 지시한다. 1차 구조조정이 끝난 99년 말 서둘러 'IMF 졸업'을 선언하고 대북정책과 복지로 눈을 돌렸던 DJ가 1년도 채 안돼 다시 고강도 개혁과 구조조정을 들고 나온 것이었다.

2차 기업 퇴출이 곧바로 정부의 2차 구조조정 의지를 가늠하는 시험대로 받아들여진 것도 이 때문이었다. 시장의 관심은 현대건설·쌍용양회·동아건설 등 이른바 '빅3'의 생사 여부에 맞춰졌다.

10월 30일, 채권단은 워크아웃(기업구조개선작업)의 대표적 실패 사례로 꼽혔던 동아건설에 대한 자금 지원을 중단했다. 남은 것은 현대건설과 쌍용양회였다.

퇴출 발표를 하루 앞둔 2000년 11월 2일 저녁. 한빛·조흥·국민은행 등 15개 채권단에 현대건설의 주거래 은행인 외환은행으로부터 한 장의 팩스가 날아들었다.

'현대건설은 강도 높은 자구계획과 만기 연장을 통해 회생을 도모하고, 자구계획이 부진한 경우 법정관리도 불사키로 한다'.

표현 강도는 높지만 내용은 결국 현대건설만은 예외로 처리하자는 것이었다. 당초 금감원과 은행들은 부실 징후 기업을 ①정상 ②일시적 유동성 부족 ③유동성 문제가 구조적이나회생가능 ④정리 등 네 가지 중 하나로 분류하기로 기준을 세워놓고 있었다. 그런데 팩스의 내용은 이 네 가지 분류 기준이 아닌 '기타'로 현대건설을 판정하자는 것이었다.

채권단은 만장일치로 외환은행의 '방침'에 동의했다. 현대건설의 '산소호흡기'를 떼자니 경제적 충격이 크고, 그냥 살려주자니 시장 반응이 걱정됐던 채권단으로선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었던 셈이다.

정기홍의 회고.

"채권단은 물론 정부도 현대건설에 대해 뚜렷한 처리 방침은 없었다. 판단을 유보하자는 뜻에서 '기타'로 분류했다."

사실 애초부터 현대건설의 퇴출은 '각본'에 없었다. 당초 11월 2일 채권단이 금감원에 보고한 현대건설에 대한 판정 결과도 국민은행만이 ④정리였고, 나머지는 ②일시적 유동성 부족이나 ③회생가능이었다. 채권단 판정대로라면 현대건설은 회생가능 기업으로 분류됐을 것이었다.

이근영의 회고.

"당시 외신은 물론 정부 내에서도 현대건설을 법정관리에 넣어야 한다는 주장이 많았다.그러나 그럴 경우 시장 충격이 너무 컸다.그래서 절충안으로 나온 것이 '기타' 판정이었다. 당장은 퇴출 명단에서 제외하지만 나중에라도 문제가 생기면 즉각 정리한다는 의미였다."

또 하나의 대마, 쌍용양회 역시 '기타'로 분류돼 퇴출을 모면했다. 쌍용양회를 살린 것은 일본태평양시멘트로부터의 외자유치였다.

진념의 회고.

"쌍용양회에 대해서도 퇴출과 회생을 놓고 논란이 많았다. 그런데 판정을 사흘 앞두고 일본태평양시멘트에서 3천6백억원이 입금됐다. 외자가 들어온 상황에서 정리할 수는 없었다."

11월 3일 오후 2시, 채권단은 2백87개 부실징후 기업 중 52개 정리 대상 명단을 발표했다. 삼성상용차 등 18개사는 청산, 동아건설 등 11개사는 법정관리, 고합 등 23개사는 매각·합병을 통해 정리하기로 했다.

그러나 당시 시장의 반응은 싸늘했다. 정리 대상 대부분이 이미 법정관리나 화의에 들어간 기업들인 데다 현대건설과 쌍용양회 등 빅2가 살아 남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결과는 당시 부실우려 은행으로 찍혀 정부로부터 경영평가를 받고 있던 외환·조흥·한빛·평화·광주·제주 등 6개 은행들엔 낭보 중 낭보였다.

현대건설·쌍용양회 등이 퇴출 판정을 면하면서 이들에 큰 돈을 빌려준 은행들도 역시 부실판정의 위험에서 벗어날 가능성이 커졌기 때문이었다.

당시 금감위는 기업퇴출과 동시에 은행 경영평가를 진행 중이었다.

금감위는 문민정부 말기인 97년 금융개혁 작업 때 올곧은 소리를 해 경제관료들에게 미운 털이 박혔던 김병주 서강대 교수를 경평위원장에 위촉했다.

익명을 요구한 당시 금감위 관계자의 회고.

"자칫 구설에 휘말리기 쉬운 은행 평가의 공정성을 높이기 위해 일부러 정부에 비판적인 인사를 골랐다. 나머지 7명의 위원 선임도 전적으로 金교수에게 맡겼다."

11·3 기업퇴출 판정 결과는 곧바로 은행 평가에 반영됐다. 특히 현대건설과 쌍용양회의 주거래은행인 외환·조흥은행엔 이들 2개 거대기업의 '기타' 판정이 천군만마나 다름없었다.

당시 두 은행은 경영진 문책과 고강도 구조조정이 따라붙게 마련인 공적자금 수혈을 거부하고 독자생존 계획을 경평위에 제출해 놓았었다. 그런 만큼 두 은행이 거액의 돈을 빌려준 현대건설과 쌍용양회의 생사는 곧바로 두 은행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었다.

익명을 요구한 당시 경평위원의 회고.

"채권은행들은 기업평가를 후하게 했다. 그래야 자신이 부실판정에서 벗어나기 때문이었다. 경평위는 회계법인의 사전 점검을 기초로 따로 기업평가를 해놓고 있었다. 문제는 은행과 경평위의 평가가 크게 차이날 때였다. 예컨대 현대건설·하이닉스·쌍용양회 등 은행의 운명을 결정할 거대기업의 경우가 그랬다. 결국 은행과 경평위 평가의 중간으로 절충할 수밖에 없었다. 은행들이 '정상'으로 분류한 이들 기업을 경평위가 독자적으로 부실기업 수준인 '고정' 이하로까지 낮출 수는 없었다."

경평위는 11월 8일 결국 조흥·외환은행에 대해 조건부 승인 판정을 내린다. 독자생존을 허용하지만 대신 뼈를 깎는 자구(自救)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금융계의 실세로 통하던 위성복 행장이 버티고 있던 조흥은행은 막바지까지 집요한 구명 노력을 펼치기도 했다. 조건없이 독자생존 판정을 내려달라는 것이었다.

평가 발표를 며칠 앞둔 11월 초.

김병주 경평위원장에게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금감위 고위 간부였다. 그는 다른 얘기 끝에 슬쩍 '본론'을 꺼냈다.

"교수님, 청와대에서 조흥은행의 독자생존을 그냥 승인해줄 수 없느냐는 전갈이 있었습니다."

"경평위에 맡기십시오. 못 들은 것으로 하겠습니다."

김병주의 회고.

"몇군데서 로비가 있었으나, 일절 들어주지 않았다. 한 군데라도 구명 로비를 받아주게 되면 평가 작업 전체가 흔들릴 것으로 생각해 딱 잘랐다."

그러나 평가작업의 진통은 발표 당일까지 이어졌다. 공식 발표를 몇시간 앞두고 열린 금감위 전체 회의에서 다시 조흥은행의 조건부 승인 판정을 놓고 논란이 벌어졌다.

익명을 요구한 당시 금감위 관계자의 회고.

"몇몇 금감위원이 '조건부 승인'이란 표현을 문제삼았다. 부실 은행이란 뉘앙스를 풍긴다는 것이었다. 위원회에서 합의를 보지 못해 이근영 금감위원장실로 자리를 옮겨가면서까지 협의를 계속했다. 결국 오전으로 예정된 발표시간을 넘기고 말았다."

이날 금감위는 발표시간을 세차례나 연기한 끝에 오후 3시30분 회의결과를 내놓았다. 결과는 '조흥·외환 독자생존 조건부 가능, 한빛·평화·광주·제주 독자생존 불가능'이었다. 경평위의 평가 그대로였다.

그뒤 한빛은행과 평화·광주은행은 금융지주회사로 함께 묶이게 된다. 금융지주회사는 98년 이후 노조와 종업원의 반발로 인수·합병 등의 구조조정이 어렵게 된 정부가 간신히 노사정위에서 합의를 얻어낸 비장의 카드였다. 다소 시간이 걸리더라도 일단 하나의 우산 아래 묶어놓으면 훗날 인력감축이나 점포정리 등이 가능할 것이란 게 정부의 계산이었다.

곡절 끝에 탄생한 우리금융지주회사는 현재 합병 등 당초 예정된 통합시한을 넘기면서 갈등을 빚고 있다.

조흥·외환은행은 이후 탄생한 국민은행(국민+주택) 등 초대형 은행과 힘겹게 경쟁하며 독자생존에 골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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