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총리에 內政총괄 힘 실어줘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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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실패한 대통령의 역사가 계속되고 있다. 집권 과정부터 정통성을 갖지 못한 대통령들이 그 죄과를 치르는 것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민주화 이후 국민의 손으로 뽑은 대통령들도 비리와 무능,국정 실패의 낙인이 찍힌 채 물러나고 있다.

이 같은 악순환은 '제왕적 대통령제' '대통령 무책임제' 때문이라고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정책적 준비가 돼있지 않은 대통령들이 국정을 직접 처리하려 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실정(失政)을 거듭해도 임기 중에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 역대 대통령들은 입버릇처럼 '내가 모든 것을 책임지겠다'는 말을 해왔다. 그렇지만 지금의 제도에서 대통령이 책임지는 방법은 단 한 가지, 하야(下野)밖에 없다.

중앙일보와 동아시아연구원(EAI·원장 金炳局)은 성공한 대통령을 만들기 위한 시리즈의 두 번째로 권한과 책임이 함께 할 수 있는 총리의 역할을 모색해본다.

편집자

그간 우리는 대통령제만 가졌지 이를 올바로 운용하는 방법을 제대로 몰랐다. 대통령 본인도 그랬고,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였다. 대통령 직선제만 되면 모두 잘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대통령 1인의 독주에 의한 제왕적 대통령제와 그 폐해는 법치민주국가의 실현에 심각한 장애가 되고 있다. 현재 방식대로 대통령제가 운영된다면 그것은 대통령 책임제가 아니라 오히려 '대통령 무책임제'다. 잘못은 총리가 모두 뒤집어쓰고 공(功)은 대통령이 챙긴다. 이런 국정운영 방식은 권한이 있는 곳에 책임이 따라야 한다는 민주적 대의정치 원리에 정면으로 위배된다.

제왕적 대통령제를 극복하는 방안이 여러 각도에서 논의되고 있다. 현행 헌법을 훼손하지 않는 방안 중 하나가 '내정 책임총리제'다. 국방, 외교·안보, 통일 분야와 대통령의 핵심 과제 몇가지를 제외한 나머지 일상 내치 행정을 모두 총리에게 위임해 분권적으로 운영하는 것이다. 대통령은 일상 행정에 대한 자신의 권한을 실질적으로 총리에게 위임하고 그 성패에 대한 책임을 총리에게 묻는다. 헌법상 대통령의 법적 권한을 그대로 유지하되 국정 운영의 실재에서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역할을 새로 설정하는 방안이다.

내정 책임총리제는 대통령과 총리의 역할을 재조정해 권한과 책임을 일치시키고 대통령이 책임정치를 제대로 수행할 수 있도록 국정운영 시스템을 강화하기 위한 방안이다. 총리의 역할이 강화되면 대통령이 선택과 집중의 원칙에 따라 직무를 보다 효과적이고 올바로 수행할 수 있다.

이렇게 되려면 권력을 바라보는 대통령의 자세부터 달라져야 한다. 권력은 나눌수록 커진다. 공산당이 지배하는 중국에서조차 권력을 나눈 장쩌민(江澤民)국가주석과 주룽지(朱鎔基)총리는 모두 힘이 있다. 江주석의 지도력은 줄지 않았으며, 국가의 통치 능력은 배가됐다.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강력한 지도자면 뭐든지 혼자 해야 한다. 권력은 나누면 약해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대통령 개인의 권력 남용을 허용함으로써 외적으로 굉장히 강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무책임할 뿐 아니라 취약한 대통령을 만들어 왔다. 권력 남용은 결국 부메랑이 돼 대통령의 권위를 잠식한다.

대통령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총리와 장관이 대신 책임을 지도록 해 수시로 바꾼다. 대통령의 국정 운영 실패에 대해 대통령 대신 책임지는 '방탄 총리', 새 이미지로 내각을 포장하는 '얼굴 마담 총리' 등 비하적 표현은 역대 총리의 위상을 반영한다.

한국의 대통령은 집중된 권력으로 독주하다 그 부작용으로 국정 운영에 실패하는 오류를 반복하고 있다. 민주화 이후 등장한 김영삼(金泳三)·김대중(金大中)정부도 마찬가지다. 그 이전의 통치 방식을 극복하지 못하고 강력한 대통령 1인이 독주하는 양상을 그대로 되풀이했다.

그 결과 '권력의 사유화'가 심화돼 권력형 부정부패가 반복됐고, 이런 부정부패는 대통령의 가족과 측근 인물들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저질러지는 양태를 보였다.

대통령이 일상 행정 업무를 총리에게 위임한다고 해서 할 일이 없는 게 아니다. 국방, 외교·안보, 통일 문제만 해도 민족의 장래를 위해 숙고를 거듭하고 온 정력을 다 쏟아도 모자랄 정도다. 대통령은 사소한 일상 업무의 부담에서 벗어나 생산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국가 비전을 모색하고 제시해야 한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국가 전략은 '빈곤으로부터의 탈출'에서 '고도 성장'으로 이어졌다. 김영삼 대통령의 우선적 과제가 '민주화와 과거 청산'이었다면 김대중 대통령은 'IMF 경제 위기 극복과 남북관계 개선'이었다.

이런 국가 목표와 관련한 비전을 제시하고, 임기 중 정부의 긴요한 개혁 과제 4∼5가지(대통령 프로젝트)의 우선 순위를 정해 대통령이 직접 관장해야 한다. 대통령 프로젝트는 대통령이 임기 동안 관심을 집중해 직접 관장하고 챙겨야 할 중요한 국가 과제를 말한다.

국무총리는 내치 행정의 실질적 책임자로서 사안별로 필요한 관계 부처 장관회의를 수시로 소집하고, 부처 간 협조가 필요한 부분에는 조정자 역할을 충분히 수행해야 한다. 이렇게 역할이 분담되면 행정부는 실질적으로 이원화돼 운용되고 분권화한다.

총리의 장관 임명 제청권도 실질적으로 보장돼야 한다. 국방, 외교·안보, 통일 분야를 제외한 나머지 장관은 총리가 주도적으로 선정해 그 임명을 대통령에게 제청해야 한다. 총리가 내치를 실질적으로 책임지고 업무를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호흡이 맞는 사람으로 팀워크를 구축해야 하기 때문이다.

총리를 중심으로 내각이 국정을 책임지고 실질적으로 운영하기 위해서는 대통령이 총리나 장관을 쉽게 교체할 수 없어야 한다. 내각의 팀워크를 보장하기 위해 총리가 해임되거나 사임하는 경우 총리가 관장하는 해당 부처의 장관들도 함께 퇴임하도록 하는 방법도 고려할 수 있다. 새로운 시스템에 맞는 상세한 절차를 정한 '국무회의 운영에 관한 법률'이나 '국무위원 임명에 관한 법률'도 제정해야 한다.

◇EAI프로젝트 참여 교수=박세일(朴世逸·서울대·위원장),김병국(金炳局·고려대·간사), 김판석(金判錫·연세대), 모종린(牟鍾璘·연세대), 박재완(朴宰完·성균관대), 염재호(廉載鎬·고려대), 이홍규(李弘圭·한국정보통신대), 장훈(張勳·중앙대), 정종섭(鄭宗燮·서울대), 최병선(崔炳善·서울대),황성돈(黃聖敦·외국어대)

◇토론 참석자=강경식(姜慶植·전 대통령비서실장), 강봉균(康奉均·전 재경부장관), 김경원(金瓊元·사회과학원장), 김영수(金榮秀·전 문화체육부장관), 김정렴(金正濂·전 대통령비서실장), 김충남(金忠男·전 대통령사정비서관), 노재봉(盧在鳳·전 총리), 박철언(朴哲彦·전 정무장관), 사공일(司空壹·전 재무부장관), 이종찬(李鍾贊·전 국정원장), 이홍구(李洪九·전 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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