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물과 수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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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채호기(1957~ ), 「물과 수련」 전문

새벽에 물가에 가는 것은 물의 입술에 키스하기 위해서이다.
안개는 나체를 가볍게 덮고 있는 물의 이불이며
입술을 가까이 했을 때 뺨에 코에
예민한 솜털에 닿는 물의 입김은
氣化(기화)하는 흰 수련의 향기이다.

물은 밤에 우울한 水深(수심)이었다가 새벽의 첫 빛이
닿는 순간 육체가 된다. 쓸쓸함의 육체!
쓸쓸함의 육체에 닿는 희미하게 망설이며
떨며 반짝이는 빛.

안개가 걷히고 소리도 없이 어느 새
물기 머금은 얼굴로 고개를 내밀고 있는 저 수련은
밤새 물방울로 빚은 물의 꽃

물의 말을 듣기 위해 귀를 적신다.

물이 밤새 휘갈긴 수련을 읽는다.


시인은 물과 빛으로 새로운 반죽을 만들어 세상에 처음으로 피는 수련을 빚는다. 수련은 깊은 물 속에 잠겨있는 우울한 물의 반죽이었다가 시인의 인식의 빛이 닿는 순간 수련으로 완성된다. 그것은 물로 빚은 것이어서 꽃을 보려면 물방울로 교직된 미세한 무늬를 보아야 하며, 꽃의 말을 들으려면 그 물방울로 귀를 적셔야 하며, 꽃의 아름다움을 음미하려면 물방울들의 운동과 파동으로 된 글씨를 읽어야 한다.

김기택<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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