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25>제103화人生은나그네길:29.가수 이미자씨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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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헤일 수없이 수많은 밤을/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이미자씨의 노래 '동백 아가씨'다. 1966년 내 노래 '하숙생'과 비슷한 시기에 나와 한 시대를 풍미한 빅 히트곡이다. 이 노래가 나올 당시 이씨는 이미 가요계에서 인정받은 실력파였다. 이 노래는 그런 이씨의 위치를 불후의 대형가수로 업그레이드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러나 호사다마랄까. 2년 뒤 이 노래는 금지곡의 낙인이 찍히는 불운을 피할 수 없게 된다. 왜색(倭色)이라는 이유에서였다. 불온한 전조는 계속 이어져 이씨의 또 다른 노래인 '섬마을 선생님'과 '기러기 아빠'도 비슷한 길을 걷게 된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이씨가 당한 이런 수모는 시대착오적이라 생각한다. 이 곡들을 왜색으로 몬다면, 일제시대부터 불려진 우리의 트로트 가요사는 전면 부정돼야 마땅하다. 아마 당시의 군사정권은 이 노래에 '폭력'을 가함으로써 정권의 민족적인 정체성을 확인받고 싶지 않았나 한다. 뒤집어 보면 그것은 일본에 대한 열등감의 표현이기도 했다.

상식이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한 것은 역시 팬들이었다. 그들은 이 노래가 금지곡이라는 사실을 아랑곳하지 않고 열렬히 사랑했다. 이들은 금지곡이라는 낙인을 되레 '영광스런 상처'로 받아들인 것이다. "미자씨. 걱정하지 말아요. 든든한 팬들이 있으니 결국 승리자는 미자씨입니다."

당시 나는 이미자씨와 함께 극장 공연을 굉장히 많이 했다. 초기 '열아홉 순정'을 부를 무렵부터 해병대 위문공연이나 시민회관(현 세종문화회관) 등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았다. 방송의 쇼 프로그램이나 시상식에서도 단골로 만나는 게 우리였다. 적어도 60년대 중후반은 우리 커플의 전성기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70년대 들어 내가 점차 하향세를 타는 사이에도 이씨는 여전히 명성을 높여갔다.

당시 이미자씨가 나에게 한 말 가운데 아직도 귓전을 때리는 명언이 있다. "가수는 처음 음반을 냈을 때의 초심(初心)과 고유성(오리지널리티)을 끝까지 유지해야 한다. 몇십년이 지나도 늘 처음 같아야 한다. '못난' 가수들에게는 노래를 좀 한다고 생각이 들 때쯤이면 무슨 '조'가 붙기 십상이다."

이런 이씨를 보면서 나는 "저 사람은 노래를 부르기 위해 태어났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일 대중가요에 정통한 사람들을 만날 때면 나는 늘 이런 말을 했다. "일본에 엔카의 여왕 미조라 히바리가 있다면, 한국에는 이미자가 있다"고. 실제로 이씨는 60년대 말 일본 무대에도 서 대단한 반응을 이끌어 내고 돌아왔다. 시민회관 귀국 공연을 통해 그녀는 확고부동한 가왕(歌王)의 입지를 굳혔다.

뭇 합동 공연 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71년 '재미 유학생을 위한 장학기금 모금 공연'이다. 나와 이미자, 그리고 후라이보이 곽규석 등 세명이 일행이었다. 가요계 사상 첫 미국 순회공연으로, 뉴욕과 LA를 비롯해 17개 도시에서 열렸다. 워싱턴에 본부를 둔 재미 유학생 본부가 주최한 행사였다. 이듬해 공연에는 이씨가 빠지고,나와 김상희·김희갑·박형준이 함께 했다.

아무튼 이미자씨와 공연할 당시, 어디를 가나 진풍경이 연출됐다. 공연 시작 전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관객들이 객석을 가득 메웠다. 이미자씨가 등장할 순간이 되면 너나 할 것 없이 손수건을 꺼내들었다. 불과 한두 소절이 그녀의 목소리에 실려 불려지면 객석은 금세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무의식 중에 '이미자(노래)=고향'이라는 등식이 싹튼 것이다.

이미자씨의 목소리에는 그런 묘하디 묘한 매력이 숨겨져 있었다. 직접 본 것은 아니고 들은 이야기지만, 이씨는 월남 위문공연에서도 그런 진풍경을 연출했다고 한다. 60년대 후반 비둘기 부대 위문 공연에서였다. 언제 만나도 이씨는 가요계의 믿음직스런 동지라는 생각이 앞선다. 동시대 다른 스타일의 노래를 구사하면서 경쟁했던 패티 김과 함께 이씨는 절세의 가인(歌人)이었다.

정리=정재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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