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중국의 두 얼굴 베이징과 취푸:거센 현대화 열풍 속에 되살아난 孔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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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베이징(北京)을 거쳐 공자 묘가 있는 산둥(山東)성 취푸(曲阜)로 가는 길에 완행버스를 탔다. 시커먼 매연을 뿜으며 분주하게 오가는 낡은 버스들. 이곳저곳 해진 옷을 걸친 농민들로 가득찬 정류장. 까치집 머리의 버스 운전사가 "취푸 취푸" 호기 있게 외치며 손님을 부른다. 그 옆에서 푸석푸석한 얼굴의 남자 차장이 승객의 차표를 받아 허리춤에 찬 꾀죄죄한 전대 안에 꼬깃꼬깃 챙겨넣고 있었다.

잊혀졌던 우리의 삼십 몇 년 저편 기억 속 과거의 장면들이 파노라마처럼 눈앞에 펼쳐지고 있다는 느낌.

어딜 가나 중국에서는 엄청나게 많은 사람들에 우선 놀란다. 그리고 그들의 가난과 그 가난에서 벗어나려는 바쁜 발놀림에 다시 놀란다. 1980년대 선전(深?)과 90년대 상하이(上海)를 휩쓴 개혁·개방 현대화의 서풍(西風)은 21세기에 베이징으로 북상하며 그 완결편을 예고하고 있다. 파고 헤치고 새로 짓는 리모델링 작업이 중국 전역에서 진행 중이다.

베이징과 취푸는 중국의 두 얼굴이다. 베이징은 중국 특유의 사회주의 혹은 자본주의를 실현하는 실험의 중심이다. 공자의 고향이기도 한 취푸는 중국 특유의 전통을 간직하고 있다. 전통과 현대가 부딪치고 융합해 새로운 문명을 창출해 가려는 역동의 두 현장인 것이다.

흥미로운 것은 자본주의 서풍이 휘몰아치는 한편에서 공자와 유교 사상에 대한 긍정적 재조명이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회주의 정권 수립 후 문화혁명 과정에 봉건적 유산이라고 내몰며 철저히 파괴했던 공자와 유교가 부활하고 있는 것이다. 취재진이 묵었던 베이징의 호텔 TV 뉴스에선 랴오닝(遼寧)성 선양(瀋陽)의 한 대학이 공자 동상 제막식을 했다는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전통적 유교와 현대적 사회주의·자본주의가 헤어졌다 다시 만나는 지점은 어디인가.

사회주의 중국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는 곳은 베이징의 중관춘(中關村)과 왕푸징(王府井) 거리였다. 한국의 대학로나 명동과 유사한 왕푸징의 차없는 거리. 패스트푸드점에서 햄버거를 먹고 커피를 마시는 젊은이들의 모습이 어색하지 않다. 우뚝우뚝 솟은 건물들 사이로 헤드폰을 끼고 음악을 들으며 걸어가는 젊은이들. 날렵한 옷차림에 휴대전화로 통화하는 모습도 낯설지 않다.

베이징대학 부근에 있는 중관춘은 '중국의 실리콘 밸리'로 불린다. 각종 정보기술(IT)산업이 집결해 개혁·개방의 기관차 역할을 하고 있었다. 자신감이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는 수많은 젊은 인재들. 한 전자업체의 직원에게 꿈이 무엇이냐고 묻자 자기 기업을 운영하면서 아파트를 장만해 사는 것이라고 했다.

중관춘은 더 이상 고유명사가 아니라 변화와 부(富)를 상징하는 보통명사로 바뀌고 있었다. 베이징대학 부근의 원조 중관춘 말고도 베이징 곳곳에 또 다른 중관춘들을 건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자존심을 실질적으로 지탱해 주는 힘이다.

중국의 자존심은 아편전쟁에서 패한 이래 형편없이 무너져 버렸었다. 중국의 자존심을 최근 다시 살려준 사람으로는 '문명 충돌론'을 주창한 미국의 정치학자 새뮤얼 헌팅턴만한 인물도 없을 것이다. 헌팅턴은 앞으로 서구 문명에 맞설 가장 강한 세력으로 동아시아 유교 문명권의 종주국인 중국을 꼽았다. 이제 세계 최강 미국이 중국을 자신들의 최대 적수,종이 호랑이가 아닌 진짜 호랑이로 인정했다! 유교 문명론은 헌팅턴의 본래 의도와는 아주 다르게 중국 지식인들의 자존심을 은밀하게 충족시켜 주었던 것이다.

그런데 중관춘과 왕푸징에서 본 젊은이들에게서 유교 문명권이란 상징적 자존심은 찾아보기 힘들다.이들은 개인의 구체적 실력과 돈을 지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자의 후손이라는 옆자리 청년이 아니었더라면 취푸까지의 덜컹거리는 시골길 여행은 괴로운 일이었을 터다. 쿵링전(孔令振·21)이라는 이름의 이 청년은 뜻밖에도 공자의 76대 손이었고 '천리마공사(千里馬公司)'에서 일하는 중기계 수리공이었다.

공자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공자는 농민을 천시했고, 임금과 아버지·남자에게 무조건 복종하라고 한 점이 잘못됐다고 답했다. 그렇지만 배울 점도 있다고 한다. 중·고등학교에서 논어의 몇 부분을 배웠는데 무슨 말인지 몰랐던 것을 사회생활을 하다보니 저절로 떠오르고 깨우쳐지는 구절들이 있다고 했다.

취재진이 도착한 날 '성스러운 도시'(聖城) 취푸에는 부슬부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매년 공자탄신 기념제와 공자문화제가 대규모 국제행사로 치러지고 공자와 연관된 국제 학술대회가 빈번하게 개최된다.

하지만 이와는 대조적인 모습도 발견할 수 있었다. "노인을 공경합시다. 경로(敬老)는 우리의 미덕(美德)입니다." 취푸의 기차역 대합실 벽에 붙어있는 표어다. 베이징에서 만난 웨이창하이(魏常海·베이징대학·철학)교수가 "부모와 어른을 공경하는 긍정적 의미에서의 공자의 친친(親親)이란 뜻이 생활 속에서 지나칠 정도로 파괴됐다"고 한 말이 연상되는 현장이다.

공자 묘는 예상보다 훨씬 크고 웅장했다.공자 묘를 안내했던 주메이링(朱美玲·27)이라는 아가씨에게 공자는 봉건이고 공산당은 반(反)봉건인데 왜 오늘날 공산당이 공자를 옹호하느냐고 좀 짓궂은 질문을 던졌다.

대답은 뜻밖에 당차고 직설적이었다. 역대 황제들이 그랬듯 공산당도 자신들의 통치를 위해 공자를 이용하고 있을 뿐이라는 것이었다. 60년대 문화혁명 때 마오쩌둥(毛澤東)의 홍위병에 의해 치도곤을 치른 자국은 오늘까지도 공자묘 이곳저곳에 선명했다. 거대한 공자 송덕비들은 모두 문화혁명 때 부서진 것을 주워 모아 90년대 이후 다시 붙인 것들이다.

마오쩌둥의 공자 비판이 아직도 중국 인민의 의식을 강하게 지배하고 있는 오늘날 공자 묘를 복원하고 공자 동상을 세우는 등의 활동을 공산당이 허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독자적 영도력에 한계를 느껴 대중의 의식을 규합할 새로운 상징이 필요하다는 방증이 아닐까.

사회주의와 유교,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이 결합을 권력과 종교와의 관계라는 보편 함수로 풀어 보면 답이 보이는 듯하다. 덩샤오핑(鄧小平)식으로 말하자면, 공자든 마오쩌둥이든 권력만 유지시켜 준다면 좋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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