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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가있는아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예쁜 간호사가 링거 주사 갈아주면서

따뜻한 손으로 내 팔뚝을 만지자

바지 속에서 문득 일어서는 뿌리!

나는 남몰래 슬프고 황홀했다

다시 태어난 남자가 된 듯

면도를 말끔히 하고

환자복 바지를 새로 달라고 했다

·바다 하나 주세요

내 입에서 나온 말은 엉뚱했다

·바다 하나요

바지바지 말해도 바다바다가 되었다

-오탁번(1943~ ) '죽음에 관하여' 전문

웃기는 이야기지만 지아비를 섬기는 지극한 한 아낙네의 '굴비 이야기'로 가슴 짠한 그런 눈물을 일러주더니, 병원에서 '바지' 대신 '바다'를 한 벌 갈아입고 나온 오탁번 시인. 그는 죽음의 순간마저 해학으로 자리바꿈하는 '슬프고 황홀한' 행간을 우리에게 언제나 나직이 열어보인다. 글쎄, '뿌리'와 '바다'가 아무래도 아주 잘 맞아떨어지는 궁합(宮合)일 듯한데. 그렇지, 바다 그 영원한 모성을 한 벌 갈아 입으셨으니.

정진규<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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