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選이 미인대회인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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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중앙일보가 주최한 아시아-유럽 프레스 포럼이 엊그제 끝났다.9·11 테러사태 1년을 맞는 시점에서 아시아·유럽 언론인들이 한자리에 모여 테러사태 이후의 국제질서, 미국의 이라크 공격, 북·일회담의 장래, 북한의 경제체제 변화와 개방외교, 그리고 한국의 대선 등에 관해 서로의 의견과 정보를 나누는 자리였다. 23개국에서 31명의 저명 언론인들이 참석했다.

국가를 경영하겠다고 출사표를 던진 대선후보라면 만사를 제쳐두고 이런 포럼에 참가해 격의없이 세계 정세를 논하고 또 대북·대미정책의 잘잘못을 따지거나 자기 소견을 밝히는 절호의 기회였을 것이다. 다행히 노무현 후보는 미리 준비한 원고를 통해 대북정책의 5대 원칙과 6대 과제를 발표하면서 대북 지원과 군축의 일괄타결을 주장했고 정몽준 의원은 대북경협을 통한 공동체 구축을 제안했다.

그러나 가장 먼저 대선 출마를 공식화했고 당내 최대 의석을 자랑하는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는 이 자리에 참석지 않았다. 주최 측의 간곡한 요청에도 불구하고 李후보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나름대로 사정이 있었을 터이지만 불참의 이유가 행여 후보 선언도 하지 않은 정치인과 자리를 함께 할 수 없다든지, 또는 해외 언론인들 앞에서 시시콜콜 검증받는 게 싫어서라면 졸렬한 처사다. 검증보다는 이미지, 또는 반DJ 지역정서로 그냥 대선까지 가면 된다는 안이한 자세에서 연유한 것은 아닌지 여러 생각을 하게 한다.

신문사 행사에 한 후보가 불참했다해서 불평하는 게 아니다. 불과 석달 남짓 남은 대선을 앞두고 돌아가는 상황이 3金시대만도 못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들은 뭔가 주장하고 호소했다. 정책도 제시했다. 민주화를 역설했고 상대를 정책으로 비판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 어떤 것도 없다. 오직 병풍만 불고 이합집산의 창당 신당만 거론될 뿐이다. 마치 여론조사로 대통령을 뽑는 듯 후보나 국민 모두 여기에 매달려 있다. TV화면엔 수재현장에 나간 후보들의 모습만 보이지 수해대책에 대한 어떤 대안도 나오지 않는다. 부동산이 난리지만 이를 막을 어떤 정책도 후보들간에 쟁점화되지 않는다. 교육 이민을 떠들어대지만 어떤 후보도 평준화를 어떻게 할지 대안 제시가 없다. 대선은 미인대회가 아니다. 어떻게 3金시대를 청산하고 21세기의 새로운 국가 경영의 포부를 펼칠지 국민들은 후보들의 흉중을 모르고 있다. 그럴 기회도 없다. 기회가 있어도 피하고 있다. 미디어 선거라고 하지만 재치문답식 TV토론이나 일방적 자기 홍보의 선거방송으로선 이 모든 것을 검증하기 어렵다.

한고조 유방(劉邦)이 신하들에게 물었다."내가 천하를 지니게 된 까닭이 무엇인가?" 여러 신하가 유방의 미덕을 들어 치켜세웠다. 그러나 유방은 말했다."나는 장막 안에서 계획을 세우고 천리 밖에서 승리하는 능력에선 장량만 못하고, 국가를 재물로 가득 채우고 백성을 어루만지며 군사들의 먹을 것을 공급하고 군량미 나르는 길이 끊이지 않게 하는 능력에서는 소하만 못하다. 또 백만대군을 연결해 싸우면 이기고 공격하면 반드시 빼앗는 점에선 한신만 못하다. 그러나 나는 이들을 채용할 수 있었다. 이게 내가 천하를 소유한 이유다." 대선은 팀워크 플레이다. 그래서 클린턴은 대통령 출마에 앞서 미국 경제를 살릴 묘안을 찾기 위해 하버드대의 라이스 교수를 찾아 국가 의제를 토론하고 조지 W 부시 또한 외교·국방·안보팀을 일찌감치 가동해 대외정책의 기본틀을 제시했고 감세정책을 내놓아 후보간 열띤 논쟁을 불러일으켰다.3金 이후의 패닉현상인가.

이번 대선에선 음해만 있지 정책 토론이 보이지 않는다. 후보 한 사람을 평가하기 어렵다면 그의 정책 참모를 보아 윤곽을 알 수 있는 법인데 그런 움직임마저 감지되지 않고 있다.

남은 3개월이나마 이 검증절차를 잘 밟아야 한다. 얼굴 콘테스트, 웅변콘테스트 아닌 정책 콘테스트로 후보와 정책팀이 검증을 받아야 한다. 실현 가능성 없는 화려한 정책을 나열할 필요가 없다. 국민생활과 직결된 중요 사안 중 핵심적인 것만 밝혀도 차별화가 되고 여론화가 될 것이다. 이를 위해 후보와 그의 정책팀은 어느 장소 어느 기회에서나 그들의 소견을 보다 적극적으로 펼치는 자세를 보여야 한다.

3金시대를 청산하자면 대선 과정 또한 3金시대와 다른 면모를 보여야 한다. 온갖 음해와 공작으로 대선을 몰 게 아니라 어젠다 콘테스트, 정책대결로 이번 선거를 치러야 3金 이후 우리 정치가 업그레이드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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