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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 심연 파고드는 영화 만들것"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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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9면

"오늘밤 여기가 저의 '오아시스'입니다. 여러분들이 주시는 생명의 물을 마시고 힘을 얻어 다시 사막으로 떠나겠습니다."

8일(현지시간) 저녁 이탈리아 베네치아 리도섬의 살사 그란데에서 열린 폐막식에서 이창동(48) 감독은 상기된 표정으로 이같이 말해 환호를 받았다.

그의 말마따나 이감독은 사막 같은 험난한 길을 달려왔다. 나이 마흔에 소설가에서 영화로 전향한 이 저돌적인 사내는 출발 총성을 늦게 들은 단거리 주자처럼 줄곧 이를 악물고 뛰고 또 뛰었다.'소지''끈''녹천에는 똥이 많다' 등으로 유수의 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그가 박광수 감독의 '그 섬에 가고 싶다'에서 조감독으로 일한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은 우려의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그는 데뷔작부터 빛을 발했다. 1996년 '초록물고기'는 주인공 막둥이를 통해 도시화의 어두운 이면을 사실적으로 묘사해 찬사를 받았고 '박하사탕'(2000년)은 시간을 거꾸로 돌리는 색다른 방식으로 군사독재·광주항쟁 등 현대사의 굵직한 문제를 건드려 또 한번 상찬 받았다. 이어 불과 세번째 작품으로 메이저 세계영화제 감독상을 수상하는 불가사의한 실력을 과시한 것이다.

"영화를 보고 느끼는 건 만국 공통이라는 것을 확인했다. 많은 이들이 '기교를 부리지 않고 정직하고 솔직하게 본질에 다가갔다'거나 '관객을 불편하게 하면서도 결국엔 인간의 심층을 파고 든 작품'이라는 호평을 해주더라."

-문소리씨가 신인배우상을 탔는데.

"문소리·설경구에 대해서는 정말 열광적이었다. 특히 문소리는 영화제 출연 배우를 통틀어 가장 인기가 좋았을 거다. 감독으로서는 두 배우가 고마울 따름이다."

-너무 빨리 거물급 대접을 받으니 부담스럽지 않나.

"2년 만에 영화제에 나왔는데 그 새 한국 영화에 대한 관심이 정말 높아진 걸 실감하겠다. 아시아 영화가 세계영화를 주도하는 데 그 선두에 한국 영화가 있다고 말하는 이들이 늘었다. 이런 분위기라 개인적으로 다음 작품 하기가 좀 부담스럽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자부심이 생기기도 한다."

-감독 지각생으로서 영화에 대한 소회가 깊을 것 같다.

"아직도 영화가 뭔지 잘 모르겠다. 그걸 알아가는 과정에 있다. 영화에는 아직 규명되지 않은 것, 숨어 있는 것이 무궁하다는 걸 점점 많이 느낀다. 계속 실험하고 화두로 붙잡고 늘어져야 하지 않겠는가."

-기자회견장에서 "귀국하면 아내(TV드라마 '고백'의 작가 이란씨)가 '트로피가 아니라 이젠 돈을 가져와!'라고 할지 모르겠다"고 해 폭소가 터졌다는데.

"물론 농담인데, 돈에 신경 안 쓰면서 만들고 싶은 영화를 해보고 싶다는 의지를 돌려서 말한 거다."

총 27억원이 들어간 '오아시스'는 전국에서 1백만명 이상의 관객이 들어야 수지를 맞출 수 있다. 현재로는 60만명이 좀 넘었다.

"이번엔 적자를 면해야 할텐데…." 전화선 너머로 근심어린 감독의 목소리가 울려 왔다.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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