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부-2여성이변해야한국이산다]능력발휘 외치다 결혼하면'집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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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서울대에서 석사과정을 밟고 있던 A씨(26). A씨는 맞선에서 만난 전문직 종사자와 결혼하자마자 갑자기 학교를 그만뒀다. 이 바람에 해당 학과 대학원은 소동을 겪었다. A씨가 뒷수습도 안한 채 말도 없이 그만두면서 조교를 급하게 새로 구해야 했고, 선후배간에 팀을 이뤄 준비하던 학술 프로젝트도 차질을 빚었다. 담당 교수는 "배신을 당한 느낌"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젊은 여성들은 높은 학력과 강한 자신감으로 뭉쳐 있다. 하지만 결혼 앞에서는 한없이 약해진다. 남녀 평등,능력 지향을 외치지만 좋은 신랑감만 만나면 태도를 바꿔 남성 의존적인 삶을 택하는 여성이 여전히 적지 않다.

중앙일보가 8월 중 서울·부산 등 6대 도시에 거주하는 20세 이상 여성들을 상대로 벌인 '한국여성의 가치관과 삶'설문 결과 '남편의 성공이 곧 아내의 성공이다'란 응답이 전체의 62.6%에 달했다.대졸 이상 학력자도 53%(고졸 미만은 77.2%)가 같은 대답을 했다.

◇직업은 '결혼 자격증'=명문여대 영문학과를 졸업해 외국인 회사에서 일해오던 정모(29)씨. 그는 최근 변호사와 결혼하자마자 직장을 포기했다. 회사에서는 정씨를 붙잡았지만 소용 없었다. "입사 때부터 결혼하면 그만 둘 생각이었다"는 답변에 더 이상 설득할 말이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 여성의 학력은 지난 30년 동안 급속히 높아졌다. 여학생의 대학교 진학률은 1970년 25.3%였지만 지난해 67.3%로 42%포인트나 증가했다.여대생 숫자는 4만2천명(70년)에서 99만3천명(2001년)으로 늘었다. 문제는 여성들의 고학력이 경제활동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국제노동기구(2000년)에 따르면 24세 미만의 한국 대졸 여성 80% 이상이 경제활동에 참여하지만 20대 후반에는 50%대로 크게 준다.

결혼과 출산을 계기로 퇴직을 하고, 이들 대부분이 일자리로 되돌아 오지 않기 때문이다. 아이 보육문제와 사회경제적 구조 등으로 인한 어쩔 수 없는 경우도 많지만 직업을 좋은 배우자감을 만나기 위한 조건으로 활용하는 일부 여성들의 의식 탓도 있다.

중앙일보 설문 결과 '남편의 수입이 충분하다면 직업을 갖지 않아도 좋다'는 의견이 29.6%였다. 평생 직장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20대 여성(91.6%)도 23.8%가 같은 대답을 해 이중적인 의식을 나타냈다.

결혼정보회사 선우의 이웅진 사장은 "남성 회원이 직업을 갖고 있는 여성 배우자를 선호하는 상황에서 여성의 직업은 주요한 결혼 조건으로 작용하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남편감은 경제력이 좋아야=한국의 미혼여성들은 배우자 조건 중에서도 '결혼생활의 안정성 여부', 즉 배우자의 경제력을 가장 따진다.

중앙일보 설문 결과(복수응답·2백% 기준)'경제력'(62.3%)과 '직업'(24.7%)을 꼽은 사람이 87.0%로 '성격'(71.4%)보다 많았다. 또 화이트칼라 직장인(66.5%)이 블루칼라 직장인(53.4%)보다, 미혼 직장인(61%)이 미혼 비직장인(54.3%)보다 '경제력'을 선호했다.

이와 달리 미국 여성들은 배우자의 직업관을 중시한다는 조사결과가 있다. 최근 한 미국 남성잡지가 실시한 '배우자의 직업과 관련해 가장 중요한 사항'이란 설문조사에서 미국 여성들은 '배우자가 자신의 직업을 소중하게 여기고 즐기느냐 여부'(43%)를 '가족 부양 여부'(25%)보다 높게 평가했다.

한국여성개발원 한정자 사회문화부장은 "경제력을 배우자 조건으로 우선하는 여성들의 심리는 아직까지 남편의 경제력에 의존하려는 성향을 뜻한다"며 "이러한 심리는 여성의 독립 의지를 꺾는 요인"이라고 지적했다.

◇여성 발목잡는 여성들=대기업에 다니던 김모(31)씨는 지난해 둘째 아이를 낳고 두달간의 출산휴가를 갔다. 그리고 회사에 복귀하는 날 바로 사표를 냈다. 이로 인해 회사에 남아 있던 다른 여직원들은 적잖은 피해를 보았다. 남자 상사는 당시 임신 중인 다른 여직원을 불러 "아이를 키울 사람은 있느냐"고 묻기도 했다. '남성보다 직업의식이 치열하지 못하다'는 사회 편견이 한 여직원의 '선택'으로 재생산되고 강화된 것이다.

이처럼 회사 사정은 별로 염두에 두지 않고 자신의 사정을 앞세워 직장을 그만두는 일부 여성들로 인해 정작 치열한 직업의식을 갖고 열심히 직장생활을 하는 다른 여성들이 피해를 보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의 대기업 남성 관리자들에 대한 인터뷰 조사에서도 직장여성에 대한 편견은 그대로 드러났다. 남성 관리자들은 ▶회사에 대한 주인의식이 남자에 비해 많이 부족하다▶철야작업, 장기출장·파견에 제약이 있다 등의 이유로 여성 인력을 기피한다고 답했다.

노동부 장신철 여성고용과장은 "남성 관리자들은 여성 인력에 대한 구체적인 능력평가 없이 여직원과 관련한 한두번의 나쁜 기억만으로 여성 전체를 평가절하하는 게 사실"이라면서 "일부 직장여성의 설익은 행동이 다른 여성에게 악영향을 끼친다는 점에서 좀더 신중하게 행동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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