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일의추천작]음산한 도시의 연쇄살인극 伊 호러물 거장 아르젠토 감독 최근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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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9면

◇슬립리스=혹시 '서스페리아'(1977년)라는 영화를 기억하는 이가 있을까? 이탈리아 공포물의 대명사처럼 불리는 영화다. 발레학교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연쇄살인극을 다룬 '서스페리아'는 다리오 아르젠토 감독의 출세작이었다.

아르젠토의 영화는 원색적인 화면, 장중한 영화 스타일로 호러 매니어에게 칭송받는다.

'슬립리스'는 그 감독의 최근작이다. 여자 두명이 기차와 역에서 각기 목숨을 잃는다. 경찰에서 일했던 모레티(막스 폰 시도)는 이 사건이 오래 전 자신이 담당했던 것과 유사함을 발견한다.

자코모(스테파노 디오니시) 역시 고향으로 돌아오는데, 그의 어머니는 그가 어렸을 적 살해당했다. 모레티와 자코모는 범인이 어느 소설을 인용해 사건을 벌이고 있음을 눈치챈다.

'슬립리스'는 전형적인 유럽풍 공포영화다. 어둡고 비가 내리는 거리, 음산한 도시에서 벌어지는 살인극을 고풍스럽게 카메라로 포착한다. 아르젠토 감독은 공포영화에 색다른 소재를 끌어들이곤 한다. 오페라와 발레·미술품 등 고전적 소재를 공포의 배경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슬립리스'에서도 비슷한 점이 눈에 띄는데, 범인은 어느 소설에 나오는 이야기를 응용해 범죄를 저지른다.

영화 속 장면들은 현란하다. 살인마는 기차와 자동차, 그리고 좁은 계단 등 폐쇄된 공간에서 칼날을 휘두른다. '서스페리아'처럼 영화는 시청각적 공포로 가득차 있으며 '고블린'의 소름돋는 영화음악이 극의 긴장감을 높인다. '슬립리스'는 '엑소시스트'처럼 비현실적인 공포가 아니라 우리 내면에 소리없이 둥지를 틀고 있는 악마성을 들춰보인다. 그래서 섬뜩한 느낌을 남긴다. 2001년작. 18세 이상 관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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